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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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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혼..그 어려운 선택


BY 그대향기 2010-04-02

 

 

한 동안 소식이 뜸하던 큰 올케한테서 전화가 왔었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내가 큰 오빠한테 한 전화통화에서 잠시 이야기했다는게 더 정확하다.

그 올케는 내 큰오빠랑 재혼한 올케다.

말이 좀 빠른 큰올케는 여전히 한꺼번에 안부를 다 묻느라 말들이 소쿠리로 갖다 붓는 듯 하다.

우리 둘째가 교통사고가 났을 때 갓백일을 지낸 우리 막내아들을 보름동안 키운적이 있었는데

그 막둥이를 \"우리아들..우리아들...\"그러면서 잘 커냐는 안부까지

내가 한마디 인사하면 \"고모야 있잖아..고모야 있잖아...\" 대여섯 마디씩 묻는다.

벌써 햇수로 20년이나 된 큰올케.

 

전남편과 사별하고 두 자매를 키우다가 우리 큰 오빠랑 재혼했다.

큰오빠는 이혼남이었고.

큰오빠의 본처는 오빠가 사우디에 가 있는 동안 좋지못한 일로 이혼을 했다.

그 일로 큰 오빠는 오랜 외국생활로 힘들게 번 돈도 다 날려야했고

가정까지 깨어져야했던 오빠 인생에서 가장 큰 충격이었다.

 

이혼을 하고 한 동안 엄마가 계시던 막내오빠네서 엄마하고 같이 생활하시다가

막내올케의 눈치도 보이고 언제까지 혼자 살수가 없어서 지금의 큰 올케와 재혼을 했다.

큰 오빠의 두 딸들은 이혼한 올케가 데리고 가는 조건으로 오빠의 위자료아닌 위자료는 엄청났고

큰 오빠는 두 딸들의 교육비조로 두말없이 다 지불해 주고야 만다.

 

올케의 좋지못한 행실로 봐서는 단 한푼도 주고싶지 않았다지만

두 딸들을 키운다는데 공부도 잘했고 이쁘기까지 했던 조카들을 기 죽이지 말고

키우라며  큰 오빠는 그 더운 나라에 가서 번 피와 땀을 다 줘 버린다.

덕분에 두 딸들은 좋은 학교를 졸업했고 직장도 남들이 부러워하는 좋은직장에 다니고 있다고 했다.

두 딸들을 끔찍하게 이뻐했던 오빠는 그렇게 힘들게 번 돈을  이혼으로 거의 다 날리고

조금 남은 돈으로 혼자서 어떻게 재기해 보려고하다가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한다며

우선 가정이 안정되어야 한다며 엄마나 주변의 친구들이 권하는 재혼을 하게됐다.

 

한번 다친 마음이라 쉽게 마음을 열 것 같지 않던 오빠는

엄마나 여동생인 내가 마음을 열라며 이런저런 이야기도 해 주고 올케한테도

무뚝뚝한 오빠의 성격을 이해하고 기다리며 살아달라고 달래기까지 하는

재혼한 오빠 부부를 단란한 가정이 되도록 그야말로 물심양면 도우게 된다.

여동생이었지만  재혼한 큰오빠 부부가 늦둥이라도 있으면 더 살갑고 웃음넘치는

가정이 될라나 싶어서 남자의 정력제도 오빠몰래 지어다 부치고 올케한테도 음란비디오까지 사다주는

당돌한 시누이였고 웃지못할 여동생이었다.

원초적인 자극이 필요하다는 판단에서 쑥스러웠지만 뭐 우편으로 가는 물건들이었으니....

그 당시  마흔을 조금 넘긴 큰오빠였지만 중년남자들이 겪는 고민을 하고 있었던 거였다.

 

초혼이 아니라 어쩌면 쉬울 것 같은데도 큰오빠와 올케는 서먹서먹했고

툭하면 올케는 나한테 전화를 해서 큰오빠의 비리를 고자질했다.ㅎㅎㅎ

주로 오빠가 너무 아기자기하지 못하다는 거였고

애기라도 있으면  둘이 늦둥이 키우는 재미로 살가울 것  같은데 애기도 안 생긴다며

시누이인 내게 큰오빠의 비리를 일러바쳤다.

그러구러 한두해가 지나고 진짜로 올케가 늦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임신을 했는데

불행하게도 감기약을 독하게 지어먹는 사고를 당한다.

 

임신이 안되고 있으니 무심결에 기침감기약을 지어 먹고는  뒤늦게 임신사실을 알고는

수술실에서 귀한 늦둥이를 잃고말았다.

그 일로 올케는 심한 자책감에 힘들어 했고 한동안 우울증까지 앓았다.

난 또 유산한 여자한테 좋다는 약을 지어다 나르고...

그 때는 나도 서른살 밖에 안된 나이였는데도 어디서 그런 생각들이 났던지.

얼마나 기다리던 늦둥인데 그렇게 어이없게 잃고는 참 많이도 힘들어했다.

그 후론 영영 아기는 안 생겼고 올케는 큰 오빠한테 미안함과 죄스러움으로 늘 죄인처럼 지냈다.

 

난 둘 사이에 애기는 없더라도 이미 전처와 전남편 사이에 있는 애들이나 잘 키우라며 위로했고

올케는 다른 동서들 사이에서도 동질감을 느끼는게 아니라 늘 한걸음 뒤에서 이질감 속에서 살았다.

같은 형제들의 피를 낳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혼자만 재혼이라는 자격지심에 언제나 외톨이였다.

그런 큰 올케가 안스러워 먼데 살면서 늘 안부전화로 위로했고 그럴수록 다른 올케들과 잘 어울리라고

전화할 때마다 달래고 부탁을 했지만 한번 닫힌 큰 올케의 마음은 쉽게 열리질 않았다.

다른 올케들한테도 큰 올케를 잘 다독여주고 맏동서로써 대우를 해 주라고 했지만 사람을 봐야하지..

맏동서네에 놀러라도 가라고 하면 아파트 문 앞에서 섭섭한 대접을 받고는 다신 안갔다는데 할말이없었다.

엄마한테도 늘 따뜻하게 대하고 큰 며느리의 자리를 지키려 노력했지만 끝내 한가족으로 뭉치질 못했다.

집안 대소사에도 얼굴을 안 내밀었을뿐만 아니라 동서간에도 아예 왕래가 없어지고 말았다.

 

언제나 다른 동서들이 자기만 왕따시킨다며 눈치를 봤고 별거 아닌 일로 큰오빠랑 티격태격.

급기야 큰오빠도 집안일에 큰 올케를 안데리고 오는 날이 잦아지더니 이젠 아예 안 온다 것이다.

그래도 난 그런 큰올케한테 단 한마디도 섭한 말로 대들지 않았고 큰오빠랑만 잘 살아준다면

그저 고맙고 감사해서 자주는 아니지만 전화로 안부도 묻고 건강도 챙겨준다.

한번씩 큰 아픔을 겪은 사람끼리 서로 위로하고 애틋하지는 않더라도 따뜻함으로 보듬어 준다면

늙으막에 기댈 친구가 되어주지 않을까?

 

큰 오빠는 퇴근해서 지친 몸으로 불꺼진 서늘한 빈 아파트에 홀로 들어서는 것 보다는

따끈한 밥상을 차려 놓고 기다리는 아내가 있으면 좋을것이고

올케는 시집 간 두 딸들을 기다리며 빈집에서 홀로 늙어가는 것 보다는 둘이서 그렇게 잘 살아만 준다면

다른 동서들이랑 왕래가 없더라도 감사하고 고맙기만 하다.

그 때 그 늦둥이만 낳았더라도 지금쯤 늦둥이 공부시키랴 둘은 아직도 바쁠건데...ㅎㅎㅎ

그 아이가 아들이었다면 지금쯤 군대에 갔을거고 딸이었다면 한창 멋부린다고 돈푼깨나 뜯어갈건데...ㅎㅎㅎ

살림살이에 유난히도 욕심이 많던 큰올케는 집안을 반들반들하게 닦아두고 고가구를 모으는데

과감하게 주머닐 열기도 하는 어쩌면 그런 일로 소일하고 사는지도 모르겠다.

건강이 허락하는한 푼돈벌이도 게을리하지 않는 살림꾼이다.

 

내가 탐냈더라면 큰오빠네 고가구는 아마도 상당부분  우리집으로 이사왔을 거다.

어쩌다 큰오빠네가서 내 눈길이 오래 머무르기만해도

\"고모 줄까? 좋으면 갖고 가...고모부 차 뭐 타고 왔어요? 오기 힘든데 오신 김에 싣고가시지...\"

그 말에 남편은 손사래를 치고 작은 차 타고 왔다면 얼른 큰오빠네 집을 나서고야 만다.

다른 올케들이랑은 지금도 전화도 왕래도 없이 지내지만

나한테는 귀한 큰올케고 큰오빠한테는 집안살림만큼은 착실하고 알뜰히 해 주는 사랑스런 아내다.

전라도가 고향이라 음식솜씨도 좋고 청소며 집안꾸미기는 누구 따라가기가 힘들 정도다.

세월이 좀 더 지나고나면 스스로 그 알에서 깨고 나와 다른 올케들과 친해질런지....

엄마의 남은 생도 얼마되지 않을 것 같은데 엄마 살아생전 화기애애한 며느리들이길 간절히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