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위가 잦아들던 겨울 첫머리.
집안 대청소에 들어갔다.
아니 분명히 말하자면 ‘대 정리’라고 해야 맞는 말이다.
쓸고 닦는 것에 그치지 않고 과감히 내다버리기도 하였다.
사용하지 않으면서 차마 처분하지도 못했던 가전제품이나 가구들도 버렸다.
장롱 속에서 계절마다 숨바꼭질하며 몇 해를 버티던 옷가지들도 미련 없이 재활용통에 던졌다.
입지도 않으면서 자리차지하고 있으니 구석구석 먼지만 쌓인다는 결론이었다.
단 며칠이면 끝날 줄 알았던 일이 시작하고 보니 여간 힘든 게 아니다.
방마다 버려야 할 것이 넘쳐나게 많았다.
딸아이 방만 정리하는데 꼬박 하루가 걸렸다.
세상 끝날 단 한 가지도 들고 갈 수 없건만 좁은 집안에 뭔 짐을 그리도 많이 들이고 사는지.
버려야 새로운 것이 들어온다는 생각으로 차분히 정리했다.
어느 정도 집안 꼴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듯 보였다.
햇볕 따스해지는 날 베란다청소까지 말끔히 끝내리라 마음먹었다.
내친김에 장롱서랍을 뒤졌다.
속옷 담긴 곳이 늘 넘쳐나고 있었다.
이것저것 골라내어 버릴 것을 따로 분류해두었다.
학교에서 돌아 온 딸아이가 흘깃 방안을 들여다본다.
“엄마, 뭐해?”
“으응, 속옷 정리하잖아. 입지 않는 것 버리려고.”
그냥 지나치던 아이가 불쑥 들어오더니 찬찬히 살핀다.
뭐가 궁금했던 것일까.
엄마가 입는 속옷이니 꽤나 흥미로울 것으로 여겼나보다.
곁에서 지켜보는가 싶더니 갑자기 키득거리며 웃는다.
“헐~! 이거, 정말 엄마가 입는 팬티 맞어? 진짜 야하네 ...깔깔깔”
그러고 보니 크기도 손바닥만 하다.
망사에 레이스까지 오밀조밀 붙어있는 것도 있고 도발적인 색상의 옷감도 있다.
과연 내가 입던 것이 맞을까 하는 의아심마저 생겼다.
명품이니 수입품이니 해서 거금주고 장만했던 기억이 난다.
사놓고 감히 몇 번 몸에 걸쳐보지 못했던 것들.
차마 버리지도 못하고 아까운 마음에 쟁여두기를 거듭했던 것이다.
장난기가 발동했던 걸까.
딸과 함께 팬티들을 종류별로 방바닥에 늘어놓아 보았다.
크기별로 구분하다가 혹은 색깔별로 나누어 보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요일팬티도 있구나.
도대체 이제껏 버리지 못하고 간직한 이유가 뭔지 나 자신도 의문이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속옷이건만 꽤나 디자인과 상표 운운하며 골랐었다.
방바닥에 늘어놓은 내 팬티의 나이먹음을 본다.
더도 덜도 아닌 것이 꼭 지금 내 나이만큼 늘어난 크기라니.
아이 둘 낳고 아랫배가 쳐지기 시작하면서 복대(?)차원의 속옷을 선호하게 된 거다.
배꼽 아래로 고무줄이 닿으면 그 아래지역으로 돌돌 말려 나중엔 발목부근에 내려와 걸쳐있을 듯한 막막함.
출렁이는 뱃살을 모아두려면 손바닥만 한 크기론 어림도 없지.
배꼽위로 고무줄이 닿아 아랫배가 푹 안기듯 해야 편안해진다.
그렇지 않으면 뒤쪽 쌍 바위 골이 팬티를 몽땅 먹어버릴 것 같은 위태로움이 예상된다.
헌데 어째 최근 것의 크기가 지나치게 크다 싶다.
크기만 그러한가.
디자인 또한 지극히 단순하다.
결혼 전 예민하고 까칠했던 내 성격이 나이 듦에 둥글넓적해진 모양과 흡사하다.
양양오일장에서 만원에 몇 개 한다는 묶음을 사온 적도 있었지.
늙수그레한 주인아저씨와도 농담 주고받으며,
덤으로 애들 양말 한 짝까지 기어코 얻어오는 넉살을 겸비한 아줌마가 바로 지금의 나다.
디자인이나 색상은 뒷전이고 면이 좋은지 고무줄이 튼튼한지 삶아도 좋은지가 우선이다.
여자 아닌 모습으로 둔해진듯하여 살짝 서글픔이 맘 곁을 스쳐가지만 이내 덤덤해진다.
몸만큼이나 여유롭고 너그러워진 내 성품이 반영된 것이라 스스로 변명 섞어 위안을 삼는다.
버릴 속옷들을 한 쪽으로 밀어놓으며 딸아이에게 슬쩍 말을 던진다.
“이거 다 너 입을래?”
“뭐야? 엄만....무슨 속옷을 물려 입냐구”
두 눈이 양 옆으로 가늘게 찢어지며 딸년은 거의 울상이다.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속옷까지 딸에게 물려 입게 하겠느냐.
제발 바라건대,
편한 것만 추구하다 팬티를 거추장스럽게 여기는 시점까지 가지 않기를.
다 집어치우고 고쟁이만 걸치는 날이 절대 오지 않기를.
2008년 12월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