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아프니 맘이 약해진다.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젊은세대는 우리시절 있을 수 있는 평범한
이야기 일지도모르는그 시절을 살피는 맘에서 읽어 주시면 감사 하겠습니다.
1974,9월 남편의 학업 뒤치닥거리와 남편의 낭비벽으로 결혼 4년 동안 손에 쥔거라고는
한푼도 없었다.울면서 친정에 가니 엄마가 한해 지은 농사를 탁 털어 30만원 짜리 전셋방을
얻어 주었고 그것을 발판으로 나는 직장에 복직하였다. 사표를 내고 남편밥이나 해줘려던 나의
꿈은 남편은 그곳에서도 벌써 빚을져서 한푼 생활비를 낼 처지가 아니다. 둘째 산후 병가,년가
산전산후 3개월 휴직 후 사표를 내려고 직장에 아이를업고간 내 몰골을 본 주위에 동료가 한사코
말리면 복직을 해야 너와 아이가 산다 울면서 말렸다. 사실 남편도 내가 복직 할것을 많이도 권했다.
그저 내꼴이 불쌍했지만 그때는 남의 눈치를 볼 처지가 아니였다. 사실 그당시둘째 동서가 서울 답십리
에 조그만한 한옥을 135만원에 구입했다는 편지를 받고 나는 남편학업 및 직장구하데 125만원들었다.
그렇게 잡은 직장을 남편의 낭비벽은 도를 넘었다. 자랄때도 그랬다는 바로위 동서의 말을 듣고 시모님
및 가족들이 입을 다물고 나만 나무라던 남편의 거짓말만 믿는 가족을 설득 시킬 용기는 내 한테는
없었다. 어떻게 양심이 그런지 지금 생각해도 지난 세월이 겁이 난다. 나는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양식과 과일 부식은 친정에서 대고 아이 둘 키우면서 직장 다니는것만 해도 벅찬데 나는 장사를 했다.
그것도 직장친구가 해보라고 하는 건어물과 친정에서 오빠가 양봉을 해 원가로 나의게 주었다.
장사는 너무 잘 되었다. 나의 봉급을 넘었다. 잘 된게 아니라 지금 생각하니 직장직원들이 일부러
내 물건을 사준것이다.
국가서 경영하는 생산공장에 나는 행정업무를 보고 있었다. 일의 능력의 따라 봉급이외에 수당이 지급
하고 시간외 수당. 생산장려금, 현장생산공무원도 일반직 공무원 보다 보수가 나쁘질 않았다.
나는 조금모자 라는생산양을 사람을 넘치도록 많이 한 사람에게 양해를 구해 양을 못한 사람에게
넘겨주면서 서로서로가 인심도쓰고 돈도 많이 타도록 해주었다. 그렇게 수고를 하면서 못해주도록
하지만 내가 할수있는 능력껏 도움을 주었다.
통근차가 오면 한분은 우리 큰 아이를 업고 나는 작은 아이를 업고 이웃에 사는 남자 직원은 내가 팔
물건을 통근차에 실어 주었다. 지금생각하면 내 꼴이 그려진다. 그 물건이 어떤 때는 통근차 안에서
반이 팔릴때도 있었다. 열심히 살려는 나를 도와주기 위한 동료들의 동정심 그때는 부끄러운 줄도
몰랐다. 아이를 델고 다닌것은 직장안에 탁아시설이 잘 되어 있어 그곳에서 키웠다.
그렇게 돈을 일년쯤 모아서 왜 그랬을까 신랑한테 얼마쯤 된다고 자랑을 했다. 친구를 시켜 거짓인지
참말인지 남의 여자를 건드려 직장을 그만둘 처지라고 돈을 내 놓으란다. 75년 9월 40만원을 털렸다.
한푼도 없이 빈 털털이다. 이래서 안돼겠다고 여겨 75년 여름 직장에서 내집갖기 운동을 해서 100만원
쯤 있어면 집을 장만할 수 있다는 말에 무조건 신청을 했다. 30만원을 1차금을 내 놓고 그런데 진짜로
없는 사람을 위해 지으려고 30평 조금 넘는대지에 18평짜리 집을 지으려고 했는데 땅이 60평이 넘어야
만 허가가 난다고 해서 신청자 거의 반이 못할 판이다. 당근 나도 신청을 빼 달라고 했다. 참고로 그당시
우리직장 직원수는 2천명을 헤아렸다.
남편이 공무원인걸 알고 추진중인 부장이 나의 등을 떠밀면서 안된다면서 빠져나가는 사람을 한명이라
도 잡아야 사업이 추진되는데 나를 빼주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친정에 또 손을 내 밀었다. 우리 친정
엄마 염치없는 딸을 너 때문에 내 죽겠다 소리가 지금도 들린다. 그렇게 시작은 집을 만들기 위해 나는
쇠뭉치처럼 설쳤고 우리아이는 부모덕에 저들도 어릴때 부터 살아가는 법을 배워 반찬 투정않고
아무거나 잘 먹어 직장동료들도 아프지도 않고 잘 큰다고 얼마나 가슴 아픈소린지 지금도 가슴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