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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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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자와 네 여자가 사는 이야기


BY 차애순 2007-10-17

 

 한 남자와 네 여자가 살아가는 이야기



새색시 시집와서 김장김치 서른 번 담그면 할머니가 되고, 총각선생님 교단에서 서른 번

 신입생 맞으면 정년을 걱정한다고 했지만, 나는 결혼하고 열일곱 번 봄을 보내고 나니 退妓 춘향 母 월매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겠다. 

 프랑스의 카사노바나 스페인의 돈 주앙은 세계적인 호색한이었지만, 우리 집 남자처럼 대담하게 한 집안에다 네 여자를 함께 데리고 살지는 못했다. 그 점을 감안한다면 이 남자는 가히 여성福과 배짱福 즐길 福도 타고난 것 같다.

 하지만 그 남자와 함께 사는 나(첫 번째 여자) 자신은 매일이 죽을 맛이다. 살아있어도 살아 있음이 아니요, 먹어도 무슨 맛인지 모르며, 심지어 아파도 왜 아픈지를 모르게 될 지경에 이르렀다.

 결혼하고 잠깐 둘째 여자가 생길 때 까진 그나마 석 달에 한번 달라지는 내 헤어스타일을 보고 “그 머리가 당신얼굴에 어울린다고 생각해?”라며 마지못한 관심이라도 보였었다. 허나 뒤로 셋째와 넷째 여자까지 생기고 부터는 아예 나라는 존재를 싹 무시하고 사는 듯하다.





 아침에 남들과 똑같은 시간대에 따순 밥 먹이고 출근 시키면 이튿날 아침에 퇴근하는 날이 많고, 남들은 하수구로 버리는 몸속 내용물을 이 남자는 도로 상수도 꼭지로 빼내는 것이 다반사다. 어쩌다 일찍 퇴근해 오는 날엔 나를 뺀 세 여자의 이불을 안 펴 줬다고 화를 버럭 버럭 내곤 한다.

 그래도 이쯤은 참을 수가 있다. 무좀 걸린 발로 온 집안 식구의 슬리퍼를 골고루 신고 다니며 전염시키면서도, 내게 그 책임을 돌릴 때는 정말 참기가 힘들다.

 “제발 좀 양말을 뒤집어 벗어놓은 채 두지 말고 세탁하게 쉽게 다시 원상복귀 시켜 주면 안돼요?” 라는 나의 부탁에 이 남자는 “양말을 안팎으로 깨끗이 빨아 말리지 않아서 우리 집에 무좀균이 퍼지게 된 거야 알아?” 하며 나의 부아를 자극시킨다. 기왕 말이 나온 김에 몇 년 전 기억을 다시 불러 와야 할 것 같다.





 5년여쯤 전, 직장동료들과 부부동반 연말 회식이 있던 날이었다. 저녁을 먹고 단란주점에 가서 음주가무를 즐긴 것 까진 좋았는데, 이 남자가 너무 취해서 내 힘으로는 제어를 시키지 못할 지경에 이른 것이다. 주점을 나와 보니 초행길인 그곳은 보행자가 버튼을 눌러야 켜지는 신호등이 있는 도로였다. 나는 술 취한 남자를 붙잡고 신호기 작동 방법도 모른 채 파란 불이 들어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헌데 이 남자, 극구 말리는 나의 손을 뿌리치곤 휘청휘청 도로를 가로지르는 것이었다. 자정이 넘은 시각이라 차들이 맘껏 속력을 내고 달리는 그 8차선 도로를.

 그때 어디선가 애앵~ 하고 사이렌 소리가 울렸고, 고요한 밤의 정적을 깨며 “지금 뭐하는 겁니까! 예~. 보행자 신호기가 있는데도 그냥 건너다니, 정신이 있는 겁니까! 없는 겁니까!”라는 소리가 확성기를 타고 울려 퍼지는 것이었다.

 순간 나는 고개를 돌려 그 남자와는 아무 상관없는 남인 척, 시치미를 뚝 떼고 아무리 봐도 캄캄한 허공에만 눈길을 돌렸다. 그러나 대한민국 교통경찰들은 내가 취한 그런 어수룩한 모션으로 대충 넘어갈 만큼 그리 호락호락하지가 않았다.





 길 건너에서 비틀거리는 그 남자에게 충고를 한 뒤, 곧바로  내 옆으로와 차를 세우더니 다시 한 번 외쳤다. “건너가는 사람이나 보내는 사람이나 다 들 똑같습니다! 똑같아!”라고.

 그때 나는 목울대로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그래 오늘 그간 미뤄왔던 마침표 하나 찍어보자.) 라고 마음을 다졌다.

 그 날,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이혼을 들먹이는 내게 이 남자는 오히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뭔 소리야? 내가 건널 때 같이 건너서 빨리 집으로 왔으면 오히려 내가 그 교통순경들 잔소리 안 들었을 것 아냐.” 고 되려 능글거렸다.

 이렇듯 맨 날 싸움의 끝은 언제나 내가 마음먹은 마침표는 못 찍고 한숨한번 쉬자고 쉼표만 찍어댔다.

 그날 이후로 나는 이 남자가 늦게 들어오는 날이면 노심초사 잠을 이루지 못해 시간마다 휴대폰으로 연락을 취하곤 했다. 그날 밤 왕복 8차선 도로를 흐느적거리며 건너가던 모습이 떠올라 혹시 이미 은하철도999를 탄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 말이다.





 그러다 내가 2년 전 몸이 아파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다. 병원에 있으면서도 집안일이 궁금하여 전화를 해 보니 둘째 여자는 마루에 드러누워 TV를 시청하고 있었고, 셋째와 넷째 여자는 자기들 방에서 숙제하는 중이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집안 유일의 그 남자가 부엌에서 설거지 중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알 수 없는 서러움을 느꼈다.

 아무리 내가 몸이 피곤하고 아파도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 집안일에서 놓여나게 해 준적이 없던 남자였다. 더군다나 중한 질병으로 혼자입원중인 내게 들르지 않고, 곧바로 집으로 가 나머지 세 여자를 위해 저녁 식사준비에다 설거지까지 한다니 너무 섭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그래 이 남자가 여태껏 나를 일회용 소모품으로 취급했던 것이야.) 라는 생각을 하며.

 빵 반죽에다 대강 눈 코 입을 콕콕 눌러놓은 것 같은 완전평면에 가까운 얼굴을 하고서도 자칭 섹쉬걸이라 고집하는 170cm에 다다르는 둘째여자.

 얼굴보다 머리카락이 너무 많아 간신히 눈, 코, 잎만 내놓고도 스스로 아름답다고 우기는 셋째 여자 뷰티걸.

 결코 작지 않은 신체적 조건과 몽골리안 형의 얼굴임에도 불구하고 큐티걸로 불리는 넷째여자.





생각해 보니 나를 뺀 나머지 여자들은 그 남자와 똑같은 L氏 성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 이유만으로도 이 세 여자들은 남들에겐 어떻게 보이든 간에, 그 남자에겐 영원히 보호받아야 하는 문화재급 존재 일수도 있다고 여겨졌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팔뚝에 연결된 검붉은 철분제 링거호스를 바라보며, 핏줄의 사랑은 위로부터 내려오는 것 이라는 진리를 터득하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물론 서러움도 거기에서 멈췄다.





 그 뒤, 어느 날인가 저녁식사 후 온 가족이 마루에 나란히 누워 TV를 시청하는데 마침 치매노인에 대한 프로가 나오고 있었다. 나는 지나가는 말로 “엄마가 벽에 ㅇ을 칠할 때면 누가 나하고 함께 살아 줄 거야?” 라고 했다. 마침 셋째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엄마 걱정 마 내가 살아줄게” 라고 했고, 첫째는 좀 깊게 생각해 본 뒤에 대답하겠다며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막 둘째가 입을 여는 찰나에 그 남자가 발딱 몸을 일으켜 세우더니 “당신 제 정신이야? 목욕탕에 가서 내 등 때 밀어줄 아들도 하나 못 낳았으면서, 당신은 우리 귀한 딸들 고생시키며 벽에 오물 칠할 때 까지 살 생각까지 했어?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내가 먼저 가 있을 테니 빨리 따라와!”라는 것이었다.

 그냥 농담으로 한 말이 아니라 정말 너무 정색을 하고 말을 하는 바람에 나는 순간 할 말을 잃어 멍하니 그 남자를 쳐다봤다.  아이 낳고 키울 때는 조금만 울어도 온갖 인상을 다 쓰고, 기저귀 한번 제대로 갈아줘 본 적이 없던 남자가 이제 와서 나를 계모로 내치며 혼자 親父인척 큰 소리를 치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





 훗날 내 친구들에게 이남자의 지나친 딸 사랑 병을 “과민성 심학규 아비증” 으로 명명하여들려 줬더니 모두들 박장대소 하는 것이었다.

 각설하고 나는 요즘 이 네 여자와 함께 사는 胃大하고 간 큰 남자에게 다음과 같은 독립선언문(?)을 작성하고 있다.

 [당신이라는 남자는 네 여자와 함께 살게 해준 나의 공로를 무시하는 고로, 이제 나는 이 집안의 일회용 소모품인 파출부가 아님을 선언 하노라! 결혼 17년 동안 어느 하루 맘 편히 잠을 자 본적이 없었고, 심지어 여행한번 가 본적이 없으니 오늘부로 나는 독립된 자아를 깨치기 위해 일체의 노력봉사를 접겠노라. 게다가 장기간에 걸쳐 알 수 없는 피곤과 무력증에 시달리다 여기 저기 수소문하여 알아본 결과, 심신소모성 조기자연사염려증 이라는 병명을 알아낸바 이에 합당한 일체의 치료비와 정신적 보상을 원하는 바이다.]

 헌데 적어놓고 보니 고민이 생겼다. 아무런 독립자금도 준비하지 않고 어설프게 독립선언을 먼저 했다가, 되려 평생을 신탁통치하에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불안해서다.





 이참에 외국자본에 기대지 않고 순수 민족(?)자본금으로만 일어설 수 있는 그런 사업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어느 작가는 우리나라 최초의 민족자본금으로 일어선 기업인은 엿장수에다 고물상이었다지만, 시대가 시대인지라 그 사업가의 명칭도 고상하게 바뀌고 있으니 근사하기조차하다.

 재활용품 수집상사, 의류 수거함 지사장, 폐 고철 매매상사 등등으로.

 아무튼 모든 게 어려운 이 시기에 지난한 과거를 가진 사람들이 일으켜 세우는 그 민족자금사업을 나마저 끼어들어 펼치기엔 너무 송구스럽다.

 아무래도 독립해서 무슨 일인가를 도모하기엔 내가 가지고 있는 두뇌의 소스가 너무 낡았다는 반성이 앞서는 게 사실이다. 네 여자를 데리고 사는 남자를 탓하기 이전에 내가먼저 새로운 지식과 지혜를 깨쳐야겠다는 사고의 전환이 필요함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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