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죽게 내버려둬야 내가 좀 편했을까. 급작스런 전화에 난 반사적으로 내려가야 한다는 의무감이 느껴졌다. 집을 나온지 넉달하고도 13일, 죽어가는 남편 생각보다 먼저 내 아이들이 떠올랐다. 이건 아니야, 그렇게 죽으면 안되지... 토요일 오후 2시... 주말이라 고속도로는 약간의 체증으로 거북이 걸음일수 밖에 없었다. 친정오빠 차에 올케언니와 딸이 함께 내려가고 같은시각 그는 구급차에 실려 강릉으로 이송되고 있는 중이었다. 도저히 손을 쓸 수 없는 상태라 큰 병원으로 옮겨야 한다고 담당 내과의가 내게 전했다. 삶과 죽음 사이에 그이가 있었다. 결국 그이도 형의 뒤를 따라가야 했을까. 먼저 가신 아버님이 해마다 한명씩 불러들이는 것일까. 죽어선 안된다는 강한 부정이 나를 짓누르지만 과연 속내가 진심이었을까. 119 에서 나와 연락이 닿지 않아 여기저기 전화를 한 모양이다. 생전 전화없던 형님이, 그리고 시누들이, 친정엄마의 전화가 내리 걸려온다. 어둠이 짙게 깔려버린 초저녁 무렵 강릉병원 응급실에 도착하니 그의 침상 옆에 지인의 모습이 보였다. 고개를 절레 흔들며 뒷걸음질 한다. 기가 막혔다. 표본실의 청개구리처럼 옷이 벗기운 채 사지가 묶여져 있다. 정월 초하루부터 다시 시작했으니 한 열흘정도 연신 마셨을 것이다. 도저히 몸을 가눌 수도 없었고 숨을 쉴 수가 없어 직접 119를 누른 모양이다. 1층 식당에서는 갑작스럽게 구급차가 오고 하니 사태가 벌어졌구나 예감했고 곧 다시 들 어오겠거니 생각했단다. 혼수상태에 빠진 그의 병명은 최근까지 함께 있었던 딸의 정황을 참고로 듣고 여러 검사 결과후 \'알콜성 젖산증\'으로 판명되었다. 병명이 뭣이든간에 죽느냐 사느냐가 우리에겐 관건이었다. 분초를 다투는 위급한 상황은 아니지만 마음을 놓을수 없는 상태며 일단 오늘을 넘겨 봐야 알것 같다는 의사의 설명이 있었다. 지겹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안하고 떨리는 가슴, 함께 온 올케언니와 오빠는 각오 단단히 하고 차분하게 기다려보자고 하지만 차분해질 수가 없었다. 가슴에서 머리에서 양쪽으로 밀고 당기는 싸움을 한다. 죽어라, 죽으면 안된다.... 수속을 밟아 중환자실로 옮겨놓고 잠시 숨을 돌렸다. 과연 이 사람이 죽고나면 우리 모두가 편해지는 걸까. 그이로부터 받았던 학대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몸이 되어 그나마 잠시의 편안함을 누렸지만 그것이 진정 나를 위한 길이었을까. 아직도 끝내지 않은 숙제들이 많은데, 부모들은 제 멋대로 살다가 귀중한 인생을 막내리 려 하다니...나보다 더 아이들 생각에 마음이 아팠다. 중환자 대기실에서 나와 숙소를 정하고 눈을 부쳤다. 자정무렵 병원에서 호출이 와 부리나케 중환자실로 들어갔더니, 혈액투석을 해야 하는데 보호자의 싸인이 필요하단다. 보호자, 그래 난 그의 보호자였다. 이제 저 스스로 아무것 도 못하는, 간난애마냥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아무 힘없는 약자인 것이다. 죽어가는 사람 바로 내 남편, 내가 살려내야 했다. 그리고 내가 책임져야 했다. 돈이 문제가 아니었다. 돌아와 몇 시간을 숙면에 취했다. 다음날 상태가 호전될 기미가 전혀 보이질 않아 다시 혈액투석을 계속해야 하며 폐기능 도 상실해 기계호흡에 의존해야 할것 같다는 의사의 진단을 들어야했다. 오빤 혹시 모르 니 준비를 해야하지 않을까 조심스레 건낸다. 이렇게 끝나는 것일까. 가을로 접어드는 길목 초췌한 모습으로 보았던 게 마지막인데, 내 기억 저편에 남아 평생 나를 괴롭히려 저 혼자 떠나버리는 것일까. 아니, 다시 살아난다 면 난 어떻게 해야하는 걸까. 제자리로 돌아가야 하나 아니면 내 의지대로 하고픈 일 계 속해야 하는 것일까 정답이 나오질 않았다. 훈련소에 있는 아들소속 부대로 전화를 하니 위독한 상태에서는 외출조차 허용이 되질 않는다고 한다. 어쩌나 이대로 사망하면 아들에게 난 뭐라해야 하나. 한없이 아이 앞에선 면목없는 에미인것만 같아 할 말이 없었는데, 이대로 그이가 가버린다면 날 평생 원망할 텐데, 희망보다 자꾸 어두운 빛이 엄습해옴을 어쩔수 없었다. 무작정 기다리고만 있을수 없다는 오빠내외가 서울로 올라가고, 딸과 나만 대기실에 남 아 면회시간만 기다리고 있었다. 간간히 찾아오는 사람들을 만나 그간의 정황을 얘기하 며 빨리 깨어나기만을 기도했다. 하루에 두번의 면회만 허용되는 병원의 중환자실, 3일째 되던 날 의식이 돌아오는 듯 하더니 고비를 넘겼다고 한다. 들리지 않는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며 앞으로 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다시 의문점이 일기 시작했다. 저녁면회가 끝나고 난 후 딸과 함께 집으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김 서린 차창이 몇 줄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황하는 나,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정말 미치고 환장할 지경이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인생의 동반자로 받아들인지 23년, 원점으로 돌아올 구겨진 내 인생에 정말이지 분노가 치밀었다. 발이 시려울 정도로 집안은 냉골이였다. 나없는 동안 단 한번도 방에서 잔 적이 없다고 했던 남편, 쇼파에서 새우처럼 웅크리고 누웠던 흔적이 어수선하게 널린 이불이 말해주고 있었다. 거실에 있던 선풍기는 이제 가스난로로 바뀌어 있었고, 그동안 나의 부재중임을 실감하는 손 탈것 들이 엄마없는 아 이처럼 나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 것도 손대기 싫었다. |||
6. 죽게 내버려둬야 내가 좀 편했을까. 급작스런 전화에 난 반사적으로 내려가야 한다는 의무감이 느껴졌다. 집을 나온지 넉달하고도 13일, 죽어가는 남편 생각보다 먼저 내 아이들이 떠올랐다. 이건 아니야, 그렇게 죽으면 안되지... 토요일 오후 2시... 주말이라 고속도로는 약간의 체증으로 거북이 걸음일수 밖에 없었다. 친정오빠 차에 올케언니와 딸이 함께 내려가고 같은시각 그는 구급차에 실려 강릉으로 이송되고 있는 중이었다. 도저히 손을 쓸 수 없는 상태라 큰 병원으로 옮겨야 한다고 담당 내과의가 내게 전했다. 삶과 죽음 사이에 그이가 있었다. 결국 그이도 형의 뒤를 따라가야 했을까. 먼저 가신 아버님이 해마다 한명씩 불러들이는 것일까. 죽어선 안된다는 강한 부정이 나를 짓누르지만 과연 속내가 진심이었을까. 119 에서 나와 연락이 닿지 않아 여기저기 전화를 한 모양이다. 생전 전화없던 형님이, 그리고 시누들이, 친정엄마의 전화가 내리 걸려온다. 어둠이 짙게 깔려버린 초저녁 무렵 강릉병원 응급실에 도착하니 그의 침상 옆에 지인의 모습이 보였다. 고개를 절레 흔들며 뒷걸음질 한다. 기가 막혔다. 표본실의 청개구리처럼 옷이 벗기운 채 사지가 묶여져 있다. 정월 초하루부터 다시 시작했으니 한 열흘정도 연신 마셨을 것이다. 도저히 몸을 가눌 수도 없었고 숨을 쉴 수가 없어 직접 119를 누른 모양이다. 1층 식당에서는 갑작스럽게 구급차가 오고 하니 사태가 벌어졌구나 예감했고 곧 다시 들 어오겠거니 생각했단다. 혼수상태에 빠진 그의 병명은 최근까지 함께 있었던 딸의 정황을 참고로 듣고 여러 검사 결과후 \'알콜성 젖산증\'으로 판명되었다. 병명이 뭣이든간에 죽느냐 사느냐가 우리에겐 관건이었다. 분초를 다투는 위급한 상황은 아니지만 마음을 놓을수 없는 상태며 일단 오늘을 넘겨 봐야 알것 같다는 의사의 설명이 있었다. 지겹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안하고 떨리는 가슴, 함께 온 올케언니와 오빠는 각오 단단히 하고 차분하게 기다려보자고 하지만 차분해질 수가 없었다. 가슴에서 머리에서 양쪽으로 밀고 당기는 싸움을 한다. 죽어라, 죽으면 안된다.... 수속을 밟아 중환자실로 옮겨놓고 잠시 숨을 돌렸다. 과연 이 사람이 죽고나면 우리 모두가 편해지는 걸까. 그이로부터 받았던 학대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몸이 되어 그나마 잠시의 편안함을 누렸지만 그것이 진정 나를 위한 길이었을까. 아직도 끝내지 않은 숙제들이 많은데, 부모들은 제 멋대로 살다가 귀중한 인생을 막내리 려 하다니...나보다 더 아이들 생각에 마음이 아팠다. 중환자 대기실에서 나와 숙소를 정하고 눈을 부쳤다. 자정무렵 병원에서 호출이 와 부리나케 중환자실로 들어갔더니, 혈액투석을 해야 하는데 보호자의 싸인이 필요하단다. 보호자, 그래 난 그의 보호자였다. 이제 저 스스로 아무것 도 못하는, 간난애마냥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아무 힘없는 약자인 것이다. 죽어가는 사람 바로 내 남편, 내가 살려내야 했다. 그리고 내가 책임져야 했다. 돈이 문제가 아니었다. 돌아와 몇 시간을 숙면에 취했다. 다음날 상태가 호전될 기미가 전혀 보이질 않아 다시 혈액투석을 계속해야 하며 폐기능 도 상실해 기계호흡에 의존해야 할것 같다는 의사의 진단을 들어야했다. 오빤 혹시 모르 니 준비를 해야하지 않을까 조심스레 건낸다. 이렇게 끝나는 것일까. 가을로 접어드는 길목 초췌한 모습으로 보았던 게 마지막인데, 내 기억 저편에 남아 평생 나를 괴롭히려 저 혼자 떠나버리는 것일까. 아니, 다시 살아난다 면 난 어떻게 해야하는 걸까. 제자리로 돌아가야 하나 아니면 내 의지대로 하고픈 일 계 속해야 하는 것일까 정답이 나오질 않았다. 훈련소에 있는 아들소속 부대로 전화를 하니 위독한 상태에서는 외출조차 허용이 되질 않는다고 한다. 어쩌나 이대로 사망하면 아들에게 난 뭐라해야 하나. 한없이 아이 앞에선 면목없는 에미인것만 같아 할 말이 없었는데, 이대로 그이가 가버린다면 날 평생 원망할 텐데, 희망보다 자꾸 어두운 빛이 엄습해옴을 어쩔수 없었다. 무작정 기다리고만 있을수 없다는 오빠내외가 서울로 올라가고, 딸과 나만 대기실에 남 아 면회시간만 기다리고 있었다. 간간히 찾아오는 사람들을 만나 그간의 정황을 얘기하 며 빨리 깨어나기만을 기도했다. 하루에 두번의 면회만 허용되는 병원의 중환자실, 3일째 되던 날 의식이 돌아오는 듯 하더니 고비를 넘겼다고 한다. 들리지 않는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며 앞으로 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다시 의문점이 일기 시작했다. 저녁면회가 끝나고 난 후 딸과 함께 집으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김 서린 차창이 몇 줄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황하는 나,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정말 미치고 환장할 지경이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인생의 동반자로 받아들인지 23년, 원점으로 돌아올 구겨진 내 인생에 정말이지 분노가 치밀었다. 발이 시려울 정도로 집안은 냉골이였다. 나없는 동안 단 한번도 방에서 잔 적이 없다고 했던 남편, 쇼파에서 새우처럼 웅크리고 누웠던 흔적이 어수선하게 널린 이불이 말해주고 있었다. 거실에 있던 선풍기는 이제 가스난로로 바뀌어 있었고, 그동안 나의 부재중임을 실감하는 손 탈것 들이 엄마없는 아 이처럼 나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 것도 손대기 싫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