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군사독재 시절에 말이다.
위정자들이 국민들을 휘잡아서 마음대로 통치하려고 써먹었던 수법...
전쟁의 공포를 국민에게 항상 상기시키면서...
정권에 반대하는 사람은 모조리 이적(적을 이롭게하는) 행위를 했다 하여
공공의 적인 사상범이나 간첩으로 몰아부쳐 마녀사냥하던 때가 있었다.
조금 민심이 뒤숭숭해지는 기미가 보이면...
지금 때가 어느 때인데...
적이 항상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다...는
식으로 대중의 주의를 환기시키고
군사정권의 고무줄같은 수명 연장에 정당성을 부여하곤 했었다...
언제일지 알 수 없는 전쟁에의 불안은
한번 혼쭐이 났던 국민들에게 아주 특효인 정신통일봉이었다.
또 전쟁이 남기고 간 잿더미 위에서
가난탈출을 부르짖는 잘 살아보세(새마을) 운동과 경제개발계획의 논리 앞에
누구도 이견을 낼 수 없었고 모두 일사불란해야 했다.
그러한 당근과 채찍은 큰 나라를 다스리는 위정자들이나 써먹었던 건 아니다.
따지고 보면 어느 조직에나 있는 것이다.
회사에도 있을 테고 학교에도 있을 테고 종교에도 있을 것이다.
심지어 한 가정인 우리집에도 있었다.
우리집의 르네상스는 아마도 남동생이 태어나서 초등학교 1학년까지가 아니었나 싶다.
내가 초 2학년에서 중 3때까지...
가끔 호랑이같이 급한 성격의 아버지와 무척 자존심이 센(열등감 ?) 엄마의 정기전 성격의
부부싸움 때문에 싸늘한 냉각기류가 집안을 흐르는 것 외에는 다른 집과 외견상 비슷했다.
그 때까지 엄마의 정신통일봉은 남들보다 배움이 짧다는 신세한탄, 열등감 토로, 친정 원망
이었다. 남들이 보태준 것도 없는데 남을 항상 의식하여 부끄러워하였다. 남들은 신경도 안
쓸텐데... 항상 남보다 못한 가방끈 짧은 점이 자나깨나 한이었다. 그 신세한탄을 듣노라니
엄마의 문제가 내게도 문제가 되어 덩달아 위축이 되었고 큰 약점처럼 느껴지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니 부끄러운 일도 아닌데 많이 부끄러워하고 창피해 했던 것 같다.
친정이 못사는 편도 아니었는데 자신에게 관심이 없어서 중학교 밖에 안 보내줬다고 외할머
니와 오빠를 원망하였다. 남들에게는 큰 약점이나 되는 것같이 지나치게 위축된 모습이었던
젊은 날의 엄마가 기억난다.
하지만 남동생이 아프기 시작한 후의 곤고함에 비하면 과거의 그러한 것들은
한갖 사치스런 투정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엄마두 나중에 깨달았으리라.
동생이 아프다는 걸 알았을 때는 마른 하늘에 날벼락격이었다.
중학교 삼학년의 어느날 늦은 오후,
수업을 마치고 돌아온 나를 보자마자 끌고 방에 들어선
엄마의 얼굴에서 무게를 알 수 없이 아주 무거운 절망을 읽었다.
엄마의 절망이 내게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시간의 모퉁이 뒤에 숨어서 나를 계속 훔쳐보며 이 순간이 오기만을 기다렸을
불행이란 놈의 무례한 출현에 소스라치며 두려움에 몸을 떨어 보았지만
미약하기만 한 내 힘으로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는 사실도 알아가고 있었다.
동생의 날벼락같은 소식에 우리 모두 깊은 불안과 슬픔의 나락으로 점점 젖어들며
고통이 고통인지도 모르는 상태가 되었는데...
중삼, 중일, 초등오 이제 사춘기에 접어 들었거나 들어가려고 하는 한참 예민한 나이의
딸들에게 온가족의 사랑을 한몸에 받던 남동생의 소식은 그 자체만으로도 아픔이었는데...
엄마는 그러한 딸들의 고통은 안중에도 없었다. 아니 미처 몰랐을지도 모른다.
육체적인 큰 변동과 더불어 심리적인 불안 상태에 놓이게 되는 사춘기라는 것에 대해
이해의 폭이라곤 전무했던 엄마, 아버지였다.
딸들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어루만져 주었더라면...
지독한 범생이였던 나였는데 엄마, 아버지에겐 못마땅한 점이 많았나 보다...
나를 무섭게 야단칠 때 항상 첫마디가 \"니 동생이 죽어간다, 임마.\"
아버지의 그 말이 지금까지 그렇게 사무친다... 나두 가슴이 아픈데 어쩌라구요...
아버지의 그 말은 엄마, 아빠, 동생의 고통은 한묶음인데 나는 아니라는 얘기였다...
아들이 아프니 엄마에게 항상 기세등등했던 아빠가 어느날 부터 변하더라... 엄마 말에
그저 고개 숙인 남자가 되어 엄마에게 동조해 주었다...
대신 그 스트레스가 딸들에게 가는 건 정해진 이치였던가... 큰 딸인 나에게 더...
나두 고통받고 있는데 나의 고통을 인정 못 받으니 그것 또한 고통이었다.
고통이 외면당할 때의 가슴먹먹함...
아픈 동생의 고통, 그런 동생을 돌보아야 하는 엄마의 고통에 대한 넋두리를 함으로써
나나 동생들의 고통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길 때의 가슴답답함...
내 고통이 이런데 너희 고통은, 너희 문제는 대수도 아니라는 식일때...
그 땐 그래도 엄마 말에 수긍할 수 있는 젊음이 있었다... 그래, 엄마 고통이 그리 클진대 나
의 고난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 미래가 있고 건강한데 뭔들 못 당하리... 하면서
엄마를 이해하려고 무진 애를 썼다.
내가 나름의 고충(나라고 왜 고민이 없었을까)으로 흔들릴 때마다 엄마의 예의
니동생이 아픈데...로 시작하는 애끓어대는 읍소를 들으며 나를 다시 채찍질로 바로 세우곤
했다... 평소에 흔들어대지나 말던가...
죽이 끓는 듯이 변덕스럽고 모질다 싶을 만치 냉소적으로 변해버린 나에 대한 태도
때문에 내가 느꼈던 혼란스러움이란...
이러는동안 내 꽃같은 사춘기, 황금같은 20대가 나두 모르는채로 흘러가 버렸다.
난 중고등학교 시절의 내 모습을 그려보면 너무 이쁘고 가여운 딸 같아서 꼭 안아만 주고 싶
다. 시골에서 갓 상경하여 도시 물정을 전혀 몰랐던 순진해 빠진 대학 1년생 소녀의 뒷모습
에서 측은함과 아련함이 묻어나온다...
그 때는 동생이 이 세상에 없으면 고통도 없어질 거라고 생각했고
엄마의 한맺히는 넋두리도 더이상 안 들어도 될 거라 생각했다.
또 그간의 무심과 냉정함도 관심과 따스한 모정으로 내게 돌아올 거라 믿었었다.
가엾은 동생을 하늘나라로 보내던 날...
그동안 너무도 고통스러웠기에 약간의 해방감을 맛보았다고 한다면 벌을 받을까?
너무 철없는 얘기인가?
그래... 그렇게 철이 없어질 만큼 내 마음은 힘들었다...
엄마도 고통에서 해방되리라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눈 앞에서 아픈 아들을 저 세상으로 보낸 한스러움이 응어리가 되어 흘러나왔다...
죽은 자식 나이 센다고 하던가...
자식 앞세운 부모의 한스러운 고통이 또 나를 괴롭혔다...
자식을 앞세워보지 않은 나로서는 엄마의 고통 앞에 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죽은 자식이 다시 살아 돌아와 엄마 가슴 속 한가운데 자리잡는다고 해도...
죽고 나서도 아들은 영원히 엄마의 그리움의 원천이었다...
어떨 적에는 왠일로 이런 말두 했다... 동생이 그리 가버렸으나 너희는 이제 모든것 툴툴
털고 잘 살아라... 고맙게도... 정말 고마왔다...
셋째가 이혼한 후로는 레파토리가 바뀌었다...
이혼한 동생의 고통에 비하면 네 어려움은 아무 것도 아니다...
처음 시작했던 사업의 실패와 건강의 악화로 괴로와 하던 나에게...
나의 어려움은 아무 것도 아니란다... 시덥잖다는 듯이...
친정에 간 딸이 통상적으로 하는 하소연인 시엄니에 대한 불평을 할라 치면
둘째의 별난 시엄니를 들추어가면서 너는 또 아무 것도 아니니 얘기도 꺼내지 말란다...
또 아무 것도 아니란다...
딸의 입을 막는 레파토리가 세월따라 자꾸 변하더군... 하지만
등장인물이나 설정만 바뀔 뿐 TV 드라마처럼 되풀이되는 비슷한 내용의 대사...
이제는 식상하다...
내 얘기는 언제나 아무 것도 아닌 것에서 면하게 되는 거냐구...
그런 날이 올런지... 아마 안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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