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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속 없냐?


BY 蓮堂 2006-07-26

끓는다.

부글부글 허연 거품이 온 핏줄을 타고 발버둥치듯 요동하다 못해 발악을 해 댄다.

내 속이 끓는다는 것이다.

남편이 출근하기 전에는 어떠한 속앓이가 가슴팍을 치고 올라와도 속으로 구겨 넣고 삭이던 재주가 스무 해를 한참이나 넘긴 오늘 아침 수해에 안양천 터지듯이 와르륵 소리를 냈다.

항상 그래 왔듯이 남편에게는 좋은 얘기든 나쁜 얘기든 눈 바로 뜨고 얘기한 적이 별로 없다. 결혼 초부터 층층시하에 억 눌린 가슴이 하루아침에 날개 펴고 비상 하기란 쉽지 않겠지만 내 성격상 가슴에 담아 두는 게 오히려 편하다는, 일종의 회피가 몸에 배어 버린 탓이기도 했다. 입으로 쏟아 내어야 할 얘기라도 선 뜻 끄집어내어서 미주알고주알 일일이 고해바치는 성격은 더더욱 아니기에 아침에 불거져 나온 참았던 불만이 출근하는 남편의 심기를 건드려야 했다.

문제는 상대방을 배려하는데 인색한 남편의 독선이다. 두 마디만 같은 말 반복하게 하면 불 같이 화를 내는 다혈질 남편의 비위를 맞추기는 참 힘들다.

나도 한 성질 하는 송곳 같은 성격이지만 드릴 같은 강자를 만난 탓에 내 성격은 어느새 무디어지고 녹슬어 버렸다. 어쩌면 체념이 한몫을 한 내 스스로가 갈아 버렸는지도 모른다. 끝이 무딘 송곳은 제 역할을 할 수가 없다. 그러다보니 쓸모없어 녹이 슬고 방치되어야 했다. 날을 세워 봤댔자 알아주기는 커녕 집안이 오히려 시끄러울 것 같았기에 알아서 기어야 했다는 게 옳겠다.

목에 힘주고 내 주장을 옳게 피력한 적도 별로 없다. 항상 자기 자신이나 다른 형제들의 목소리에 더 귀를 기울인 남편이고 아이들이 성장해서는 아이들 - 특히 딸아이 -  의견을 더 설득력 있게 받아 준 남편이다. 한 마디로 난 빽이 없다.

그 이유는 모르겠다. 내가 덜 떨어져서인지 아니면 케케묵은 사고, 즉 ‘여자’임이 더 강하게 의견 묵살에 힘을 실어 주는 건지는 몰라도 내 의견은 번번이 휴지조각에 불과 했다. 참으로 더럽고 치사하다는 생각이 항상 목구멍 입구를 들락 거렸지만 이말 역시 입 밖으로 뱉어 보질 못했다.

불만이 있어도, 못 마땅한 게 있어도, 맘에 안 드는 부분이 있어도 항상 멀찍이서 방관만 해 온 내 무능에 서서히 화가 나기 시작했다.

이 나이에 이젠 드러 내 놓고 털어놓을 수도 있지만 남편에게 지레 겁을 먹은 탓에 입이 열리지 않는다.

남편의 대답을 미리 점쳐놓고 나니 용기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오곤조곤한 대화 말미엔 항상 찌꺼기가 남기 일쑤다. 어차피 결론은 남편이 정해 놓고 시작한 대화이기에 과정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끼어들어서 번복할 만큼 주변머리가 뛰어나지도 않았고 강한 주장이 남편을 우습게  보거나 앞지른다는 소리 들을까봐 항상 수위를 낮추고 밀리는 척 해 주어야 편했다. 남편을 어르고 달래는 재주가 전무한 내 능력의 한계다.

물론 잔 머리를 굴릴 수도 있으련만 그것이 ‘유치’로 변질되어 자존심을 건드릴 것 같았다. 부부지간엔 유치할수록 좋은 거라고 했던 어느 명사의 우스개가 생각났지만 말처럼 쉬운 것 또한 아니었다..

8월 한 달은 주말과 휴일에 짜여진 스케줄이 많지만 아직 동의를 구하질 못했다.

이젠 통보형식만 취해줘도 감지덕지 할 나이에 동의를 못 구해서 전전긍긍 하는 내 자신이 오늘아침처럼 불쌍하고 무능해 보인적도 없다.

휴가계획을 짜는 남편의 말끝에 그날은 안 된다고 했다가 벼락을 맞았다.

한 마디로 ‘되지도 않은 계획’을 세워 놓고 자기 말에 초 친다고 화를 낸 것이다.

식탁에 앉아서 아침이랍시고 젓가락으로 밥알 두어 개 입속으로 밀어 놓다가 그대로 찬물을 뒤집어쓰고 보니 밥알이 목구멍에서 넘어가질 못하고 곤두서고 말았다.

‘나는 속도 없냐?......왜 번번이 당신이 누르는 대로 체널을 옮겨 다녀야 하냐?’

‘내가 당신 의복이냐? 내가 당신 그림자냐?’

‘난 왜 한번도 나를 내 맘대로 조종 할 수가 없냐?’

‘나도 운전 할줄 아는데 뒤에 앉은 당신이 왜 운전 하냐구’

‘백수는 주말도 없고 휴일도 없냐?’ - 남편은 주말과 휴일은 자기 뜻에 따라 주어야 입이 벌어진다. 내가 따로 계획을 잡아 놓았다가는 이 같은 불상사가 생기게 마련이다.

말하자면 남편은 ‘백 시트 드라이버(back seat driver)\'였다. 수렴청정이 따로 없다.

아침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 갔다가 올께’라는 짧은 인사말을 여느 때처럼 남기고 출근하는 남편의 등 뒤에다가 마지못해 ‘다녀와요’라는 기어들어가는 인사말도 현관문턱에 걸려서 넘어가질 못했다. 문턱을 넘기 힘들었던 아침인사였다.

나에게도 문제는 있다.

필요이상의 몸 사리는 것부터가 화를 자초 한 것이고 부딪히기도 전에 미리 아프다고 머리 감싸 쥐는 비겁을 낸들 모르겠냐만 이제 와서 부부지간의 틀을 바꾸어 놓기란 쉽지 않을 것 같다. 이 생각 역시 한발 물러 선 자기 방어 같지만.

아무런 사고나 문제없이 사회생활 30여 년을 한 남편에게 따르는 수식어는 많다. 점잖고 예의 바르고 분별력 있다고들 칭찬 하지만 유독 나에게만은 틈을 주지 않고 빡빡하게 군다.

양반 못 된 것이 장(場)에 가서 호령 한다더니................

만만한 놈은 성도 없다고 했지만 건드려서 속 좋은 놈 있으면 어디 나와 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