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의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예전에 뵈었던 분이라 기분이 몹시 착잡했다.
하얀 상복을 입은 친구의 모습에서 이제 우리 나이가 맞아야 할 하나의 과정을 실감케 되었다.
장례미사는 차분하게 좋은 분위기에서 고인을 하느님 곁으로 보내는 아름다운 절차였다.
미사를 마치고 나오는 유족들의 얼굴에서 흐르는 눈물, 콧물에서 영영 이별의 어쩔 수 없는 아픔을 읽을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와서 어머님께 이런저런 분위기를 전해 드렸더니 대뜸 하시는 말씀이 있다.
“어쨌든 일단은 딸이 있어야 해. 그래야 제 부모를 위해 진심으로 슬프게 울어주거든.”
나는 딸인 내 친구가 울었다고 말씀드리지 않았는데, 그저 가족들이 슬피 울더라고만 말씀드렸을 뿐인데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걸까.
어머님은 4녀 1남을 두신 분이다. 게다가 따님들의 어머니 사랑은 정말 극진하고 애틋하다.
어머님의 눈물겨운 희생 위에 당신들이 성장했음을 알기에 보답의 정이 남다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말씀을 듣는 며느리는 서운하다.
어머님의 그 말씀에 진짜로 남처럼 싸늘한 맘까지 생긴다.
여태껏 그런 말씀을 한두 번 하신 것도 아니건만 늘 그때마다 맘이 식는다.
하긴, 장례식장에서 정말 절절하게 울 사람은 핏줄일 것이다.
고부의 인연이란 인위적으로 맺어진 인연 중에서도 더욱 알 수 없는 거리를 갖게 하는 인연이리라.
하긴, 내가 본 몇 안 되는 상가 집의 경우에도 모두 호상이라 그런지 크게 슬픈 분위기를 느끼게 했던 곳은 없었던 것 같다.
친 자식들의 얼굴에서도 무너질 듯한 슬픔보다는 차분한 받아들임의 여유를 더 많이 읽을 수 있었다.
그럴진대 하물며 며느리 자리가 그렇게까지 서럽게 울어댈까 하는 생각도 든다.
어머님은 또 며느리의 눈물은 진심이 아니라고도 말씀하신다.
그럴 때 나는 왜 어머님께서 꺼내시는 진심이란 단어에 거부감이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진심이란 단어는 참 아름다운 단어인데 그 말조차 난 덜 아름답게 생각한다.
왜일까?
예전에는 때때로 며느리로서의 나의 진심이 궁금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자문을 하지 않는다.
언제부턴가 진심은 전혀 중요치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따지고 묻는다면 내 진심을 말할 수 있다.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나도 나의 친정 부모님이 시부모님보다 더 좋고 피로 연결된 형제들이 시댁 식구들보다 더 마음이 간다.
시부모님을 모시고 산 세월이 16년.
그 세월동안 어찌 고단함이 없었을까.
자기들끼리 오붓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며 가진 부러움도 참 많았다.
할 수만 있다면 나도 내 속 편하게 우리끼리 살고 싶은 마음이다.
간혹 어머님께 억울한 꾸중이라도 듣게 되면 가슴 속을 울리며 터져 나오는 소리들이 내 목을 자글자글 간질인다.
그러다 때론 찌푸리는 얼굴까진 못 감추고 들키곤 하지만 그래도 금방 다시 가면을 쓴다.
그리고 가짜 말을 한다.
하지만, 그 모두가 가짜는 아니다.
형님들이 한결같이 나를 아껴주시니 거기에 감사하는 마음은 진실이다.
시댁 조카들 하나 같이 착해서 정말 예쁘게 생각하며 지낸다.
어머님 비록 나를 힘들게 하실 때도 많지만 내가 미워서 일부러 그러는 분은 절대 아님을 잘 알고 있다.
때문에 조금만 더 내 맘을 편하게 해 주신다면 함께 사는 일에 속상해 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언젠간 오게 될 어머님과의 영영이별에서도 어머님이 강조하시는 오진 눈물을 흘릴 것도 같다. 어머님은 그때 내 눈물을 뭐라 하실까.
그러나 이러한 내 맘들까지도 다 진실이 아니면 또 어떠랴.
만에 하나 나의 웃음이, 나의 희생이 모두 다 가식이라 하더라도 속에 가진 나쁜 진실을 드러내는 것보다는 차라리 더 낫지 않을까.
생겨나기를 별로 모질지 못해서 남 마음 다치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늘 내가 숙이며 사는 못난 인생이다.
그런 삶에서 가장 큰 피해자는 사실 나 자신이지, 진실이 아니란 이유로 남에게 피해를 주지는 않지 않는가.
가까운 사람 하나가 있는데 그녀는 나와 정반대이다.
하고 싶은 말은 꼭 내뱉어야 하고 속에 감정을 숨기지 못한다.
그래서 참 나빠 보일 때가 많다.
어쩌면 저렇게 살 수 있을까 신통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난 그녀를 욕하지 않는다.
왜냐면 나도 그녀처럼 살고 싶기 때문이다.
난 속을 감추면서, 사실은 그녀처럼 살고 싶어 하면서 그녀를 욕할 순 없다.
오히려 부러워하기까지 한다.
그러면서도 난 그렇게 살지 못한다.
타고난다는 것. 그게 참 무서운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차라리 진심 따위에 무관심해지기로 했다.
중요한 것은 진심이 아니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내가 택한 것은 결코 선이 아니다. 내 맘의 평화일 뿐이다.
나를 희생하는 것조차 결국은 나를 위한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내가 편치 않으니까...
그렇다고 나를 욕하지도 않는다. 또 욕먹기도 싫다.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가 좋아 보인다면 그 속의 진실은 굳이 캐내려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다.
가식으로라도 세상에 선이 가득하다면 진실된 악으로 가득한 세상보단 차라리 낫지 않을까.
물론 진실로 선이 가득한 세상이 가장 아름답다는 것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터이고...
오늘도 내일도 나는 여전히 착한 사람으로 보일 것이다. 늘 익숙한 그 모습.
그것이 진짜 내 모습인지는 나조차도 모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