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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동기부여(6)-스님


BY 솔바람소리 2025-07-12

집으로 돌아가는 택시 안에서 스님(비구니)께 전화를 드렸다. 10시가 가까운 시간이었다.
나는 스님이 주무실 시간에 거의 전화를 드린 적이 없었다.
”네, 보살님. 말해요.“
특별한 일 없고서는 안부 전화조차 드린 적 없던 신도였기에 나의 갑작스러운 연락은 늘
스님을 긴장시켰을 것이다.
”아빈이에게 연락이 왔어요.“
 
-6년 전 가족에게도 쉽게 꺼내지 못했던 아들과의 연을 끊은 사실을 스님께 말씀드린 
적이 있었다. 나의 눈물 앞에서 ‘괜찮아요, 보살님. 아빈이가 힘든 일이 있었나 보다. 
기다리면 연락 와.’ 강원도 사투리 억양으로 따뜻하게 위로해 주셨었다. 그런 놈 연락 
따위 기다리지 않는다며 내게는 이제 아들이 없다는 설움에도 ‘지랄한다. 맘에 없는 말
하지 말고 기도나 열심히 해요.’ 괴팍한 언어와 달리 정감 담아 다독여주셨었다. 우연히 
알게 되어 23년 동안 나의 험난한 인생의 여정을 제일 가까이서 지켜보셨던 스님은 
나의 잦은 고난에 
‘업보도 두텁다... 나무 관세음보살’ 안타까워 해주셨던 분이셨다.
새해를 시작할 때 가족의 1년 등이나 부처님 오신 날에 연등을 달 때조차 전화나 
문자로 부탁드리기 일쑤였던 나를 대하는 모습이 늘 한결같으셨다. 나와 대화를 
할 때면 ‘아빈이는 아직도 연락 없어요?’ 잊지 않고 안부를 물어 주셨던 분이셨다.-
 
”오메야. 연락 왔드나? 별일 없고?“
늦은 저녁 갑작스러운 연락으로 긴장하고 받으셨던 분이 이내 반색하셨다.
”지금 **경찰서에서 아빈이 보고 가는 길이에요.“
”경찰서는 왜...?“
 
택시 안에서 편하게 나눌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지만 주무실 때면 전화기를 꺼놓고 
계시는 걸 알고 있기에 지체할 수 없었다. 택시 안에서 간략하게 상황을 말씀드렸다.
”떠난 사람도 안 됐고...아빈이는 우얄꼬...관세음보살...“
나의 말이 끝나도록 듣고 계셨던 스님께서 혀를 차셨다.
”죄송하지만 아빈이가 지금 많이 두려워하고 있어요. 제가 장례식에 참석하게 되면 
그들과 시끄럽게 좀 더 얽히게 될 것 같아서 가지 않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애를 혼자 둘 수도 없고 해서요. 스님께서 저 대신 아빈이 곁에 좀 
계셔주세요. 연미가 구천을 떠돌면서 아빈이 곁에 머물지 않도록 기도도 해주시구요.“
 
스님이 되시기 전까지 3딸의 엄마이자 무속인이셨던 분이셨기에 누구보다 엄마인
나의 심정을 깊이 헤아려 주셨다. 나의 부탁을 기꺼이 받아주시겠다던 스님께 다시 
연락 드릴 것을 말씀드리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아빈이에게 문자를 남겼다. 
<통화 가능할 때 연락 줘.> 
집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아빈이에게 연락이 왔다.
목소리는 더 지쳐있었다. 장례식장 가는 동안 연미의 가족들에게 더 시달린 듯했다.
참석하지 않은 나에 대해서 좋지 않게 말했으리라 짐작했다. 아들에게 연미 고모가 
”자네 엄마 혹시 무당인가?“ 물었단다. ”아니요, 일반직장 생활하세요.“ 아들의 대답에
”기가 쎄. 보통 사람이 갖고 있는 기가 아니야.“ 라는 말을 했단다.
 
이혼 전 미래가 보이지 않는 현실의 고통 앞에서 자주 찾은 곳이 점집이었다.
그들 대부분은 내가 들어서면 머리가 아프다고 했다. 나의 눈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무속인들도 있었다. 기에 눌려서 점을 볼 수 없다는 무속인도 있었다. 그리고 하나같이
내가 신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그중 한 명이 내가 신 받기를 거부하게 된다면 아이들에게 불행이 닥칠 것이라고 했다. 집안이 발칵 뒤 집어지지 않았다면 저주 같은 말을 들은 후
겁이 났던 나는 신을 받으려고도 했다. 친정 식구들과 애들 아빠에 의해 많이 혼이 난 듯 
머지않아 그 무속인의 점집 간판이 보이지 않았다. 
아빈이가 초등하교 1학년 때 아이들과 무작정 서울을 떠나서 도착한 곳이 동해였다. 
낯선 곳에서 홀린 듯 벽면에 <**암>이라는 글씨와 화살표를 따라갔었다. 절일까? 
짐작하고 도착한 곳은 겉으로 보기에 시골의 작은 일반 가정집이었다. 그곳에서 스님을 
뵙게 되었다. 당시에 승복은 입었지만 머리는 남자처럼 짧은 커트의 무속인이셨던 스님을
뵌 후 신비한 경험을 겪기도 했다. 당시 스님이 말씀하셨다. 내가 신 줄이 있긴 하나 
불려 먹을 정도는 아니라고. 아이들 관련해서 벌벌 떠는 내게 함부로 아이들을 빌미 
삼아 돈벌이 하려던 그 무속인이 오히려 화를 맞았을 거라고도 하셨다. 그리고 다시는 
점집을 찾지 말라고 당부하셨다.
남들에게 함부로 대한 적 없어도 나의 포스가 범접하기 어렵다는 얘기를 자주 들었다. 
사회생활에서 마이너스가 된다고 여겼던 부분인데 연미고모가 느낀 나에 대한 기는
오히려 분위기 파악은 했을 테니 다행이라 여겼다.
 
”엄마가 스님께 네 곁에 계셔주시라고 부탁드렸어.“
”와 주신 대요?“
다행히 아들은 엄마 대신 스님이라도 보낸다는 말에 위로가 된 듯했다. 
장례식에 들르신 스님은 연미의 가족들이 아들에게 입관을 봐야 한다며 고집을 
부리거나 틈틈이 다그침을 계속하는 그들을 대할 때마다 사람 하나 더 잡으려고 
작정했냐, 이럴 거 걱정해서 보살님이 자신을 보호자로 대신 보낸 거라고 나무라시며 
아들 곁에 든든히 계셔주셨다고 했다. 한 많을 연미를 위해서 계시는 동안 경을 
읽어주시기도 했다. 
화장터로 가기 위해서 관을 옮길 때 스님의 만류에도 입관을 보지 못한 아들이 함께
들었다고 했다. -아들은 오랫동안 관 안에서 덜컹거리고 움직였던 연미가 생각난다며 
괴로워했다.-
장례를 마치고 화장터로 떠날 때 스님께서 내가 아들에게 말했던 것과 같은 말로 당부
하셨다고 했다. ‘화장이 끝나면 누가 뭐라고 해도 곧장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하지만 그날 아들은 그들에게 끌려서 수목장과 연미고모가 다닌다는 점집같은 절까지 
들러서 자신의 사주까지 적고 왔다고 했다. 말을 듣지 않은 아들에게 화가 났다. 장례와 
화장터 관련 비용에 대해서 묻자 모두 자신이 카드로 결제를 했다고 했다. -수목장에
관련 비용도 아들이 냈다는 것은 후에 알게 되었다.-
죽어서까지 아들을 쉽게 놓지 않는 연미가 원망스러웠다. 혈육의 마지막 이별조차 
돈 한 푼들이지 않은 연미 가족의 사리사욕 앞에서 진저리가 쳐졌다. 하지만 어차피 벌어진 
일에 대해서 더는 따지지 말고 그들과의 인연을 끊으라고 아들에게 당부했다. 
나는 최대한 빨리 아들이 연미의 그늘에서 벗어 나기만을 바랬다.
 
이사 전까지 아들은 연미와 함께 지냈던 집에 들어가는 것을 두려워했다. 나와 연을
끊은 후 제 아빠와 연락을 하고 지내며 연미를 가끔 보여주기도 했단다. 
연미를 예뻐했다는 애들 아빠는 아들에게 연미 소식을 전해 들은 후 간혹 전화로 술에 
취해서 울기만 할 뿐 모습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런 아빠를 대신해서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던 아들의 3째 큰아빠가 연미의 짐 정리 하는 것을 많이 도와주신 것으로 
안다. 감사했다. 공황장애까지 생긴 아들 때문에 나와 딸이 수시로 아들 곁을 지켜야 했다.
다니던 직장까지 결국 사직서를 제출한 아들에게 연미 오빠가 수시로 연락을 해서
불러냈다. 그날도 연미오빠의 부름이 있다며 어딘가로 택시를 타고 간다는 아들의
연락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