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최명길씨가 진행하는 라디오프로에서
\"봄에 행복감\" 이라는 시를 들은적이 있다.
아름다운 봄을 다시 맞이할 횟수를 헤아려 가늠하며
그 예상에 행복해할 수도 불안해할 수도의 느낌에 따라
행복감의 느낌은 다르리라는....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의 전율은 지금도 생생하다.
조금 더 기운이 떨어지기전에
옛 기억들이 더 희미해지기전에
예사롭지않은 내 삶의 자욱들을 기억해내 활자화 시켜놓고 싶다는
해볼까에서 해보자의 적극적 바람으로 일렁임은
아마도 나이탓일지도 모르겠다.
나이가 들면 흔히 말하는 가방끈 짧은 주눅들림에서 벗어난다던가.
내 학력은 국졸이다.
그 6 년이라는 세월도 올바로 채우지못한 절름발이 육년이랄까.
5학년 초입에 완도 외딴섬에서 국민학교 선생님이셨던
외삼촌이 결혼을 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외숙모가 몸이 약해
잦은 병치레를 하셨다.
해서 갓난쟁이 사촌을 돌볼 여자아이가 필요했는데
가난에 찌들려 배곯기 일쑤인 우리집 아이 하나 입을 줄이자는 결정에
가장 적합한 아이가 나로 지목되었다.
그 섬을 도착하고보니 최고 학년이 사학년이어서
하는수없이 난 사학년생의 학생이 되어버렸다.
섬 아이들, 그중에서도 선생님의 자질이 부족한 우리 삼촌처럼
시간메꿔 월급이나 타먹자의 선생님이 그 시절엔 얼마나 많았던가....
(지금도 그런 부류의 선생님은 계시겠지만)
억척할머니셨던 외할머니께서 막내아들의 밥통을 채워주고자
공부는 별로지만 운동을 조금 했던, 대학 떨어진 막내를 위해
음성적 거래를 하셨는데 그 결과가 사대 체육과 학생이었다.
그 결과물이었으니 말해 무엇 하겠는가
산골에 들어가 겸업하여 달구새끼를 키워보겠다는 욕심으로
지원한 시골국민학교 선생님이시니 어린 내눈에도 여엉 아니올시다였다.
밤이면 화투판이 벌어지고 그게 끝나갈 무렵이면
닭을 잡아 죽을 끓이느라 나랑 외숙모는 종종걸음을 치곤했다.
중학 입시를 위해 6학년이던 그해 오월 삼촌댁을 떠나기전까지
섬 세곳을 전근다니신 삼촌을 따라 돌아다녔다.
마지막으로 떠나왔던 섬에서는 총 학생이 십여명이었는데
내가 갔던 그 해엔 2,4,6학년 학생들이 외삼촌 한 분의 지도하에
고작 국어책 읽는, 오전수업만으로 마무리 되곤 했다.
그러한 실정이니 6학년의 한 남자아이는 한글도 제대로 못 읽었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큰 도시로 되돌아왔던 육학년 오월의 기억은
아주 생생하다.
섬에서 전학올 때 삼촌이 만들어주신 기록부엔 올 수가 가득 채워져있었고
그걸 보신 선생님의 입가에 번지던 웃음의 의미는 아리송하기만 했다.
비웃음같기도 하고 흐뭇한 웃음같기도 한데 아마도 전자의 의미가 진했으리라.
첫 등교한, 우리집 구역에 속한 학교는 육학년의 아이만도 천여명에
다다랐는데 그날은 산수시험이 있었다.
분수가 무엇인지도 몰랐던 그날 치뤄진 산수시험에서
난 68등이라는 성적을 냈고 틀린 분수문제 갯수만큼 매를 때리기로 정한
선생님의 규칙에 따라 난 참으로 여러대 매를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