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강남구 논현동 학동사거리 근처에 있는 한 케이블 방송국에서 일할 때였다. 우리 집이 연희동, 회사가 논현동, 1시간 남짓
걸리는 거리였음에도 운좋게 한번에 가는 버스가 있었으니, 바로 12번 좌석버스. 연희동, 신촌을 지나 이태원을 지나 강남으로.
이 버스를 타고 나는 매일 출퇴근을 했다. 야근을 밥먹듯이 하던 직장이라 주로 아침 11시나 12시쯤 느지락이 출근해서 밤이나
돼야 퇴근할 수 있었다.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다 보면 불야성을 이루는 이태원 거리. 거기를 지나갈 때마다 언젠가
여기서 술을 마셔봐야지 마음먹었다.
그 시절 나는 주로 신촌이나 홍대 근처 애들이나 다니는 값싼 술집에서 골뱅이에 소면을 한 사라 시켜놓고 술을 먹던가 아니면 마포
돼지껍데기집에서 소주에 돼지껍데기 안주를 자주 먹었다. 논현동의 양반집이라는 단골 감자탕 집에서 폭탄주를 마시고 뒤로 훌러덩
자빠진 적도 있었고. 어쨌든 이 물이 지겨워 좀 색다른 곳을 찾던 차 모처럼 똑 떨어지는 날을 만났다. 야근을 하고 열시 무렵에
퇴근하려는데 다른 프로그램에서 일하던 작가, 모 그룹의 드러머를 사귄다고 살짝 귀뜸해준 친구와 마음이 맞은 것이었다. 그 친구와
마음이 맞아 이태원으로 술마시러 갔다.
여기 저기 찾아 다녀도 어디가 괜찮은 곳인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누가 특별히 추천해준 술집도 없었고. 다리에 힘이 빠질 무렵
우리는 한 구석에 눈에 띄지도 않게 붙어 있는 바를 하나 보게 되었다. 바 이름이 캘리포니아였는지 산호세였는지 아니면
로스엔젤레스였는지 암튼 미국의 도시 이름인 곳. 이름 값을 하느라고 출입문 옆에 플라스틱으로 만들어논 야자수 나무도 한그루
있었던 것 같다. 우리는 특별히 끌리는 구석도 없는 이 집에 들어가 술을 마시기로 결정했다.
조그만 병맥주 하나에 3천원이라. 내가 주로 노는 물이었던 신촌보다 맥주값이 비싸다. 하지만 안주를 안시켜도 되니, 많이도
아니고 찔끔찔끔 술마시는 우리에겐 여기가 더 싸다고 볼 수 있겠다. 우리는 3천원짜리 밀러 두병을 시켜 놓고 앉아서 얘기하고
있었다. 얘기를 하면서 바를 둘러보니. 흠. 남다른 데가 있는 ’빠’다. 손님이 다 남자고 바텐더가 바에 서서 술을 만들고
있었는데. 이 남자의 행색이 또 예사롭지가 않은 것이다. 가슴까지 내려오는 굵은 은목걸이에 블라우스가 무색할 정도로 잔잔한
꽃무늬가 박힌 하얀 남방. 가슴에 털도 안난 주제에 단추까지 서너개 풀어헤치고. 프랭클린인지, 더글라슨지, 밥인지. 생긴건
토종인데 미국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우리가 고르고 골라서 간 바는 알고 보니 게이바였다. 옳다구나 싶었다. 얼마나 재미있는 일이냐. 나와 다른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그래서 나와 성이 같은 여자보다는 남자를 만나는 것이 재미있고 많고 많은 남자보다는 남자 비스무리한 게이를 만나는 것이
더 재미있다. 여담이지만 나는 그 후에 늙수그레한 게이를 한 명 알게 됐는데 그와 얘기하는 것이 그렇게 재미있을 수 없었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마초보다는 게이라고. 마초보다 게이를 사귀고 싶다는 얘긴 아니다. 게이가 나를 좋아할 일이 없으니. 하지만
게이들은 보통 남자들과는 다르다. 대체로 볼 때 섬세하고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보통 남자들보다 많다. 그래서 여자들과 사사로운
얘기가 잘 통한다. 게이도 여러 질이라 물론 그중에 마초와 게이를 겸하고 있는 사람도 있다. 이런 경우를 만나면 나는 똥밟았다고
한다. 마초는 내가 싫어하는 타입이고 게이는 나를 좋아할 리 없으니.
어쨌든 우리는 거기 앉아서 안주대신 부장을 씹고 선배 작가를 씹고 몇 푼 안되는 우리의 월급에 한탄하고 돼먹지 못한 매니저들에게 욕을 했었다. 그러고 있는데 갑자기 남자 한명이 허락도 없이 우리 자리에 턱 앉는 것이다.
“언니들 뭐 재미난 얘기라도 하고있나?”
그의 옷차림을 묘사하고 싶으나 생각나지 않는다. 그걸로 봐서 그는 분명 보통의 차림새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티나게
꽃무늬 남방을 입었다거나 가슴을 풀어 헤쳤다거나 풀어 헤친 가슴 사이로 은색 목걸이를 착용한 건 아니라는 얘기다. 생각나는 건
다만 중키에 동글동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는 것.
이 남자가 우리에게 제안했다.
“언니들, 나 점볼줄 아는데 점봐주면 맥주 한 잔 사줄래요?”
내 머리는 순간 3천원을 두고 계산에 들어갔다. 쪼잔하게 시리 컴퓨터가 바쁘게 마구 움직인다. 3천원은 복채라 칠 때 큰돈은
아니지만 이 게이가 사이비일 경우 3천원이 날아가는 거다. 하지만 그 3천원으로 게이가 술 한병 마시는 동안 우리와 재미있는
대화를 나눴다고 치면 그게 뭐 손해일까 싶었다. 나는 흔쾌히 승낙했다.
나는 태어나서 한번도 점을 본 적이 없다. 내가 점을 안믿어서가 아니라 점집에 대한 무서운 기억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국민학교 다닐 적, 나의 라이벌(공부를 잘해서)이었던 시장통 참기름 집 둘째딸 김태숙. 한번은 김태숙이를 길에서 만났는데 걔가
대나무에 깃발달린 집에서 나오는 거였다. 알고 보니 김태숙이네 엄마가 갑자기 신이 내려서 멀쩡하게 하던 참기름 집을 때려치고
점집을 차렸다고 했다. 그 집이 용하다고 소문나서 후에 내 동생 대학(그것도 후기때) 시험칠 때 우리 엄마가 30만원 들여서
굿한 집이다. 어쨌거나 그 집에 놀러갔을 때의 좀 으실으실했던 기억 때문에 커서도 점집이 좀 으실으실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아무튼. 나는 그 으실으실한 점집에서가 아닌 미국냄새 물씬 나는 게이빠에서 난생 처음으로 점을 보게된 것이다. 단돈 3천원에.
그때 내 친구가 점을 봤는지 안봤는지 도무지 생각나지 않는다. 나는 다만 그 게이 점쟁이가 나한테 해줬던 말들이 어쩌면 그렇게
딱 들어맞는지 경탄을 했었다. 덧붙여 세월이 흘러 생각해보니 그 점쟁이한테 꼭 물어봐야 했던 것이 있었는데 그걸 못 물어본 것을
너무나 아까워하기조차 했다.
술상 앞에 앉은 점쟁이는 종이에 내 생년월일과 태어난 시간을 적더니 뭔가를 꼽아보았다. 그리고는 내게 한다는 말이,
“언니 사주는 무난한 편이네. 무난하고, 지금 뭐 안좋은 수가 하나 끼어 있는데... 큰건 아니고 부동산쪽에 마가 끼었어.
부동산이 있으면 되도록 지금 사고 파는건 하지 말고 혹시 문제가 걸렸으면 빨리 해결해야 돼. 놔두면 썩는다고. 그리고 돈 있으면
돈놀이 할 생각은 일절 말아. 언니는 돈놀이, 뭐 주식같은거 하면 안되겠어. 쪽박찰 팔자야. 돈 있으면 얌전히 적금들거나 하여튼
은행에 넣어놔야돼.”
그 외에도 3천원짜리 점 치고는 실하다 싶을 정도로 이것 저것 두런 두런 많이 얘기했었는데 딱 이부분이 나를 감동시켰다. 와,
완전히 족집게다! 바로 그 점쟁이에게 점을 봤던 시기가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겪는 수난시대라 할 수 있었다. 집 주인이 집과
연관돼서 재판에 들어가는 바람에 등기설정을 안해둔 나는 전세금을 떼이느냐 마느냐 하는 기로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전세금은
내가 직장생활하면서 고스란히 모은 시집갈 자금이었는데. 그것 때문에 법무사를 만난다 어쩐다 하면서 법석을 떨었던 시기였다.
그리고 또한가지 나의 귀를 잡아 끌었던 말이 있었다.
“언니는 보니깐 연예인 사주네. 남들 앞에서 재주부리고 사는게 적성에 맞아. 아니면 그 비슷한거라도 하던지. 장사나 뭐. 사람들하고 비비며 살아가야될 팔자야.”
이것도 딱 맞는 말이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남들 앞에서 노래부르는 걸 좋아했다. 남들 이목끄는 걸 좋아해서 국민학교다닐 땐
가장행렬에 끼고 싶어했고 소풍가면 반 대표로 춤을 췄고 심지어 식구들끼리 앉아서 삼겹살 구워먹을때도 자식들 대표로 노래를
했었다. 그런데 문제는 연예인이 되기엔 상판이 안받쳐준다는 것이다. 내 얼굴은 텔레비전용이 아니다. 왜냐? 납작하기 때문에. 좌우로 넙적한 것이 아니라 앞뒤로 납작하다. 그래서 입체감이 없는 상판이다. 영화
와이키키 부라더즈에 나왔던 그 여자, 오뭐더라? 한겨레21에 인터뷰 기사도 쓰고 하는 그 영화배운데 이름을 까먹었다. 하여튼 내
얼굴은 그 오씨 여인을 좀 닮은 편이다. 아니, 조금 더 납작하다. 내 동생이 오죽하면 나를 ‘도미’이라고 부르겠는가. 그나마
결혼하고 나선 ‘도미부인’으로 격상되긴 했지만 내 얼굴은 예나 지금이나 납작하다. 이런 얼굴은 카메라용이나 무대용으로
부적격이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가수는 물론 밤무대 가수로도 부적격이다. 하지만 나는 어떻게 어떻게 이 얼굴로 연예계에 비비고
들어가 그 시절 연예기자나 작가 나부랭이로 살고 있었으니 어찌 그 점쟁이가 신통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
그 점쟁이가 내게 말하길 큰 돈벌 팔자는 못되도 고만고만하게 살 팔자라고 그랬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흡족했다. 근데 나이드니까
그때 꼭 물어봤어야 했는데 하고 아쉬워지는 부분이 하나 있다. 내 인생 말년 팔자가 어떤지 궁금하다. 물어봤다면 그 점쟁이가
용했으므로 아마 족집게처럼 대답해줬으리라. 내가 생각할 때 나는 부모와 시부모 운이 있는 것 같다. 두 부모님들이 너무 좋다.
부모 운이 있어서 초년고생을 안했고 시부모 운이 있어서 중년 맘 고생을 덜고 있다. 하지만 나의 말년 운은 어떨까. 다시 한번
그 용한 게이 점쟁이를 만나면 물어봐야겠다. 내 말년운이 어떤지.
하지만 그를 어디서 만난단 말인가. 나는 한국에서 머나먼 독일에 있고 그 시절 산호세인지 로스엔젤레스인지 캘리포니아인지 하는
바를 전전하던 그 게이는 어쩌면 진짜 산호세나 로스엔젤레스나 캘리포니아로 이민을 갔을 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면 게이빠에서 사주봐주고
술을 얻어먹는 일을 청산하고 얌전한 색시를 만나 결혼했을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