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달 만에 퍼머를 했다.
별로 긴 머리가 아니어서 두 달만 되면 어김없이 웨이브가 주저앉는 직모(直毛)인 관계로 더 이상 시간을 끌면 석 달 열흘 앓고 난 중병 환자 같은 부스스한 모습이어서 미련을 떨 수가 없다.
단골 미용실에서 와인색 코팅도 같이 해 달라는 주문을 했다.
어련히 알아서 했거니 했는데 평균치 이상으로 색이 강하고 웨이브가 골뱅이 같이 작아서 맘에 들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보수적인 남편의 레이더망을 쉽게 벗어나지 못할 것 같아서 은근히 걱정이 되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퇴근한 남편의 눈자위가 상하로 곤두박질쳤다. 벌겋게 꼬불거리는 게 마뜩찮다는 표정이다.
나이를 들먹이더니 당장 원상복귀 시키라고 했지만 수리가 불가능 하다는 미용사의 말에 버티기 작전으로 나갔다.
구겨 넣어서 숨길 수 있는 부위도 아니고 가발을 쓰고 다닐 수도 없다.
그래서 삭발하기 전에는 내 머리모양에 변화를 감지 못하는 둔한 남편의 눈에 딱 걸리고 나니 마뜩찮은 시선도 무시하고 배.째.라.’로 간덩이를 키웠다.
아닌 게 아니라 내가 봐도 어색하고 낯설어서 자꾸만 거울을 보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익숙해져서 이젠 예전의 머리가 촌스러웠다는 간사함에 은근히 유혹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아파트 앞에 옷장사가 왔다.
별로 살 마음 없이 기웃거렸다.
꽃 그림이 요란하고 잠자리 날개 같이 살랑거리는 그린 색 주름치마가 눈길을 끌기에 쳐들고 이리저리 헤집어 보았다.
그랬더니 구레나룻이 시커멓게 얼굴 반을 덮고 있는 옷 장수가 잽싸게 검은 비닐봉지를 벌리고 집어넣는다.
안산다고 손 사레를 치는 나를 보고 엄지손가락을 세운다.
“하이코, 아지매요. 그 빨간 머리엔 이 츠마(치마)가 쥐긴다 안카요. 두말 말고 사 가이소 마. 나 간 뒤에 땅바닥 치지 말고..........”
머리카락에 대해 신경을 끊고 있었는데 갑작스러운 옷장사의 ‘빨간 머리’운운 하는 너스레에 점점 얇아지던 두 귀가 결국엔 지갑을 열게 했다.
까짖거 엎어진 김에 쉬어 간다고 쥐긴다 하니 누군가를 한번 쥐겨 보는 것도 해롭지는 않을 것 같았다.
옷장사의 꼬드김에 치마와 어울릴 법한 비슷한 색깔의 얇은 티셔츠도 사고 보니 이만저만 낯선 게 아니다.
내가 과연 저 옷을 입어 내긴 입어 내려나.
지금껏 동네에 잠시 나가더라도 이렇게 획기적인 차림새를 한 적도 없고 그러려고 시도조차 해 보질 못했다.
언제나 청바지나 정장바지 또는 반듯한 스커트 외에는 입어보지도 못했다. 윗도리는 가슴팍이 조금이라도 깊게 패이면 어색하고 거북해서 싫었고 어깨에서 한 뼘 이하로 내려 가 본적이 없는 짧지 않은 소매를 입었었다.
더구나 이렇게 하늘거리며 속이 언뜻언뜻 내 비치는 옷은 아예 내 옷이 아니라는 고루한 생각만 가지고 살았기에 옷 한 벌을 사놓고 고민에 빠져야 했다.
팔자는 길들이기 나름이라는데. 이렇게 땀구멍 막아대는 더운 날씨엔 적격이라는 나름대로의 명분을 가지고 한 벌을 입고 거울 앞에서 안 하던 짓을 해 봤다. 앞뒤를 재 봐도 그런대로 봐 줄만은 한 것 같았다.
앞이 패인 것 같은 셔츠를 뒤로 잡아당기고 가슴을 커버할 요량으로 진주 목걸이를 걸었다.
평소대로 옅은 화장을 하고 진달래색 루즈를 발랐다.
붉은 머리에 붉은 입술 그리고 중앙선이 약간 보일 듯 말 듯 한 가슴팍, 민소매는 아니더라도 어깨위에서 아래로 살짝 걸쳐진 소매, - 쥐면 한줌 밖에 안 되는 스판 티셔츠가 상하좌우 굴곡대로 몸에 달라붙어서 숨어있는 살까지 몽땅 밖으로 끄집어냈다.
그러나 내가 봐도 그렇게 뵈기 싫지는 않은 것 같아서 드디어 바깥으로 진출했지만 자신만만은 잠시의 착각이었다.
동네 사람들이 나만 보는 것 같아서 양산으로 앞을 가리고 숨을 듯한 잰 발걸음으로 친구 집 엘 갔다.
친구의 동그랗게 벌려진 눈을 보고 나서야 이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발악을 하냐고 묻는다.
발광을 한다고 했더니 허리를 꺾고 눈물이 나도록 웃는다.
내가 하도 진지한 표정을 지었더니 ‘아니, 이뻐’ 라는 거짓말로 미안해하는 게 눈에 보였지만 당장 벗어 버리고 싶었다.
입고 갈 옷을 빌려 달라고 했더니 이젠 용감해 질 때라고 하면서 손을 내 저었다.
집을 나설 때는 씩씩하게 나섰지만 돌아 갈 길이 천리만 같았다. 이때쯤이면 동네 아낙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서 아파트 앞에 진을 치고 있을 시간이다.
학원 차들이 줄줄이 들어 올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러잖아도 잔뜩 오그라든 마음인데 주차장에 모여 섰던 대 여섯 명의 동네 새댁들이 나를 보더니 일제히 입을 벌린다.
“아유..아줌마.... 아줌마 아닌 줄 알았어요. 그 옷....웬 일이세요?”
옆 라인에 사는 진형이 업마가 입을 가리고 웃는다.
“예쁘긴 한데요.... 아줌마 이미지엔 안 어울려요............”
수진이 엄마도 한몫 거들고 나선다.
“아줌만 단정한 옷이 더 어울려요.”
“ 야 해요.....호호호.....그 옷 저 주세요.......”
오며가며 만나면 깎듯이 인사 나누는 이쁜 새댁들이지만 혹시라도 나이 든 사람 놀리는 모양새가 될까봐 위로인지 격려인지 모를 말을 말미에 한마디 더 보탠다.
“눈에 익으면 이쁜데 아직은 낯설어서 그래요”
“앞으로 계속 그렇게 입고 다니셔도 이젠 괜찮을 것 같아요.”
아...창피해라..........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고 했는데, 나의 변신은 유죄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