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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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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친절하다.


BY hayoon1021 2006-06-03

 

 

가만 보면 요즘 세상은 너무 친절하다.

어제만 해도 그랬다. 고장 난 비디오를 서비스센터에 맡기면서 나는 당연히 며칠은 걸릴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다음 행선지인 은행 문을 들어서기도 전에 서비스기사한테서 전화가 왔다. 그는 꼬박꼬박 사모님 소리를 붙여가며 고장원인을 상세히 설명하고는 아무리 싸게 해도 수리비가 3만원은 들겠다고 너무나 조심스럽게 용건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 정도는 각오하고 있었던 나로선 정작 비용보다도 그 기사의 깍듯한 태도가 부담스러워 땀을 뻘뻘 흘려야 했다.

은행도 마찬가지였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직원이 기다렸다는 듯이 허리를 구십 도로 숙여 맞이해 준다. 요즘은 결재나 하면서 책상에 느긋하게 앉아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 직책과는 상관없이 남자직원들은 모두 창구 여직원 옆에 한 사람씩 붙어 서서 원활한 일처리를 도와주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환한 웃음을 머금고 손님을 대했다. 그 웃음이 진심인지 겉치레인지는 따질 필요 없다. 하루에 몇 백 명이나 되는 손님을 그렇게 웃으면서 상대한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니까.

은행 일을 마치고 장을 보고 있는데 또 전화가 왔다. 다 고쳤으니 언제든 찾아가라는 전화였다. 접수에서 수리까지 단 몇 시간 만에 끝나다니, 나는 새삼 놀랐다. 기사는 직접 화면을 틀어 보이며 어떤 과정을 거쳐서 고쳤는지 꼼꼼히 설명했다. 돈 주고 물건만 찾아오면 될 줄 알았는데 뜻밖에 비디오 특강까지 듣게 된 셈이었다. 잘 알아듣지도 못 하면서 나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모든 절차가 끝나자 그는 마지막으로 고객설문지 한 장을 내밀었다. 아하, 그제야 난 기사가 그토록 친절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렇다고 기분이 나쁘거나 실망스럽진 않았다. 다만 그런 족쇄에 묶여 친절을 베풀어야 하는 기사의 입장이 좀 안타까웠다. 

하긴 친절로 무장한 사람이 어찌 그들뿐이겠는가? 조금만 둘러보면 친절한 사람은 도처에 널려 있다. 가끔 시켜 먹는 치킨 집 아저씨의 상냥한 말씨는 살살 녹을 지경이고, 승객이 탈 때마다 일일이 인사하는 버스기사의 끈기는 작심하고 지켜보던 내가 먼저 지칠 정도이다. 백화점이나 할인점 직원들은 오직 고객을 위해서 존재하는 사람들 같다. 쌀자루를 날라주는 택배아저씨도 절대 툴툴거리는 법이 없다. 고객만족센터 전화상담원들은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할 정도로 공손하다. 참으로 흐뭇한 사회현상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나는 이런 친절이 낯설고 불편하다 못해 황송할 때도 있다. 예전의 권위적이고 위압적인 분위기에 익숙했던 사람이 느끼는 당혹감일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내 상품가치에 따라 언제고 돌변할 수 있는 조건부 친절이라는 점이 꺼림칙한 것이다. 문제는, 그런 거부감이 시간이 지나도 수그러들 줄 모르는데다 이제는 불안해지기까지 한다는 점이다. 갈수록 친절해지는 세상이 내 눈에는 그만큼 각박하고 살기 어려운 세상이 돼 간다는 뜻으로 비쳐지는 것이다.

그들의 친절은 거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다음 날 서비스센터 소장은 문자로, 기사는 직접 전화로, 비디오가 잘 작동되는지 확인해 왔다. 그 성의가 고마우면서도 좀 과하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말이 좋아 무한 경쟁이지 결국 죽어나는 건 우리 자신들이다. 서비스기사 정도면 전문직 기술자다. 번듯한 직장에 수입도 안정적인 그들조차 살아남기 위해 저리 몸부림쳐야 한다면, 일개 노동자에 불과한 우리 같은 사람이 느끼는 위기감은 말할 나위도 없다. 

나는 세상이 더 이상 친절해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 거품이라는 의심이 자꾸 들기 때문이다. 그냥 좀 무뚝뚝하고 덜 친절해도 기본과 원칙이 살아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우리처럼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사람도 성실하기만 하면, 내일 일이 어떻게 될까 불안해하지 않아도 되고, 무시당하거나 기죽을 필요도 없고, 돈을 떼일 염려도 없는 그런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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