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왜 이렇게 유년기 추억이 없나 몰라. 기억이라곤 아빠 손잡고 초상집엘 갔다가 깜감한 밤에 돌아온 거. 요거 하나 달랑이야.”
유년시절 얘기를 미주알 고주알 얘기해대는 나를 두고 어떤 친구가 그랬다. 그러면서 유년시절의 기억이 많은 사람은 안그런 사람보다 더 행복한 유년시절을 보낸 사람이라고 한다.
글쎄다. 그러면 나는 행복한 유년시절을 보낸 축일까. 그때의 생생한 기억이 많은 걸 보면.그때 엄마가 사준 신발모양, 우리
유치원에 2마리의 목마가 들어오던 날, 유치원에서 방송국 견학갔던 일... 좋은 것 나쁜 것 탁 털어서 제일 생생하게 기억나는
건 도둑질한 기억이다. 딱 두 번 연달아, 그것도 제일 친한 친구네 집에서 도둑질을 한 적이 있었는데 우리 아버지가 알았다면
뒤지게 맞았을 일이나 다행히 나는 이 일을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았다. 완전범죄. 하지만 20년이나 지난 이 자리에서
남사스럽지만 내가 생전 처음으로 남의 집에서 돈을 훔쳐낸 사실을 고백하려고 한다.
그러니 쉿!
때는 1976년. 당시 우리집은 대구와 포항 직행버스가 30분 간격으로 오가는 버스 정류장 맞은 편, 감나무가 많은 마당넓은
집이었다. 당시의 내 가장 친한 친구는 박덕선이라고 버스정류장 옆에 코딱지만하게 붙은 형제 시계방 맏딸이었다. 그애는 현금이
오가는 장삿집 딸이라 그런지 단 것을 늘 입에 달고 살았다. 우리 엄마는 우리 집이 그 집보다 잘산다고는 했지만 자식들
군것질에는 인색하여 내가 군것질 타령이라도 할라치면 부지깽이부터 드셨다. 글쎄다. 내가 이 도둑질에 대한 합리화를 하자면 다음과
같은 이유때문이 아닐까도 싶다.
‘단것에 환장해서’
하여간 언니와 오빠가 인근 국민학교에 등교를 하고 나면 나는 언니에게서 물려받은 군청색 유치원복을 입고, 하얀 타이즈를 신고,
군청색 가방을 메고 오른손엔 낮잠용 분홍 담요때기를 말아들고 집을 나선다. 형제시계방에 들러 덕선이와 함께 유치원에 가는 것이
중요한 나의 일과였으므로 길을 건넌다. 늘 시계방은 셔터문이 내려진 채로 있어 셔터를 두들기거나 흔들어야만 누군가가 나왔다.
덕선이 아빠가 나오는 날은 드물고 주로 덕선이 엄마가 나온다. 남자용 흰 고무신을 끌고 파마머리가 산발이 된(이 시절 파마가
유행이었는지 사실은 생각이 안난다. 허나 덕선이 엄마의 머리는 파마를 했든 안했든 늘 산발이었다고 사료된다) 덕선이 엄마가 눈을
비비며 나와 셔터를 올리고 문을 열어준다.
“안녕하셔요?”
나는 예의바르게 문안인사를 드린다. 고개까지 숙이며 인사하지만 덕선이 엄마 주로 무반응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시계진열대 뒤
3인용 인조가죽소파에 얌전하게 앉아 덕선이 엄마가 밥할동안, 밥하며 남편에게 악다구니를 퍼부을 동안, 그러면서 덕선이 머리통을
쥐어박아 애가 울동안,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20분이건 30분이건 말없이 기다린다.
그때는 내가 매일같이 일방적으로 기다려야 한다는 것에 대한 불합리성을 논리적으로 따지기엔 나이도 어렸지만 그것보다는 덕선이와 무슨 일이 있어도 함께 유치원에 가야한다는 것을 하나의 ‘숙명’으로 받아들였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날.
다른 날과 다름없이 불꺼진 형제시계방 3인용 인조가죽소파에 앉아 있었는데...
아침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반짝이고 있는(약간의 과장이 섞였음) 어떤 물체 하나가 내 눈에 들어왔다. 시계진열대 밑 살짝 문이
열려진 여닫이 문 틈으로 삐져나온 100원짜리 동전. 찬란하게 빛을 발하고 있는 그 100원짜리 동전을 바라보다가 바라보다가.
결국 슬쩍 그것을 집어 주머니에 넣고 말았다.
샬랄라
유치원을 향하는 내 발걸음은 가벼웠다. 오전내내 무얼 사먹을까 고민하다가 유치원이 파하자 곧장 집으로 오지 않고 덕선이와 함께
국민학교 앞 동신문구사에 들렀다. 동신문구사는 문구만 파는게 아니라 각종 자질구레한 불량식품이며 애들 완구며 운동회에 필요한
각종 물건, 심지어 핫도그까지 튀겨 파는 만물상이었다. 문구점 아저씨는 나를 ‘이쁜이’라고 불러주셨다. 나 외에도 거의 모든
여자애들을 ‘이쁜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그 희소성이 떨어지긴 했으나 나는 그렇게 불려질 때마다 기분이 좋아져 웬만하면
동신문구사를 찾았다.
평소 먹고 싶어 환장했던 우주선 모양 플라스틱 용기에 든 색색 풍선껌을 100원어치나 집어 들었다. 덕선이와 나는 양볼때기가 미어터지게 껌을 쑤셔넣고는 단물을 빨며 기쁜 마음으로 집에 돌아왔다. 단맛이 내 죄책감을 희석했다.
다음날.
형제시계방 인조가죽소파에 다시 앉은 나.
나는 또 색색 풍선껌을 사서 입안 가득 쑤셔넣고 단물이 빠질 때까지 껌을 씹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져 다시한번 진열대 밑 여닫이 문을 바라다 보았다. 그러나 행운은 이틀 연달아 오지 않는 모양이다. 문은 안타깝게도 닫혀있었다.
아! 시인하고 싶지 않지만 그때 이미 나는 문을 열어볼까 망설이고 있었다. 돈이 눈에 띄어 집어 올리는 행위와 돈을 훔치기 위해
금고문을 여는 행위는 엄연히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재판에서도 전자는 우발적 범행이라 죄가 가볍지만 후자는 계획적 범행이기
때문에 죄가 무겁다. 어린 내가 그런 걸 알리 없었지만 어쨌든 망설였다. 망설이고 망설이던 끝에 발칙하게도 요렇게 결론을 내렸다.
“일단 문만 조금 열어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만 보지 뭐!”
손을 뻗어 여닫이 문에 손가락을 갖다 대는 찰나...
갑자기 가계방 여닫이 문이 촬랄라 열리며 덕선이 엄마가 산발한 머리를 불쑥 내밀었다.
“앗!‘
불에 데인 듯이 손은 움찔, 마음은 찔끔 하는데...
덕선이 엄마가 잠에 절은 목소리로 나를 부르신다.
“너 이리 좀 와봐라!‘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죄인처럼 덕선이 엄마에게 다가간다.
덕선이 엄마는 100원짜리를 내게 내밀며,
“너 콩나물 100원어치만 빨리 좀 사와라”
나는 가방과 담요때기를 인조가죽소파 위에 두고는 아줌마가 주신 100원을 들고 큰길을 건너 우리집을 지나 유강식당을 지나 다시 우회전을 하여 뚱보 아줌마네로 갔다.
뚱보 아줌마는 간판도 없이 조그만 하꼬방같은 데서 식료품을 파셨다. 콩나물, 두부, 시금치, 배추, 그리고 큰 고추의 배를 갈라
잡채를 채우고 밀가루를 입혀 튀겨낸 고추튀김. 콩나물 시루에는 콩나물이 빽빽하게 들었을 때도 있고 벙벙하게 들었을 때도 있다.
아침에는 주로 빽빽하게 들었다. 콩나물 100원어치를 비닐봉다리에 넣어 다시 불꺼진 형제시계방으로 돌아온 나. 덕선이 엄마는
아침상을 차리고 애들을 두드려 잡아 씻기고 입히고 하느라 정신이 없다.
나의 시선은 다시 한번 진열장 아래 여닫이 문에 꽂힌다. 정신을 집중해 손잡이를 쳐다본다. 여닫이 문은 전체적으로 허연색인데 손잡이 부분만 땟국말이 절어있다. 손잡이를 쳐다보다 결국 아주 조금만 문을 열어보았다.
빨간 플라스틱 바구니가 들어 있고 그 안에 자질구레한 종이쪼가리, 그리고 천원짜리 지폐 몇 개. 가슴이 뛰었다.
‘저렇게 큰 걸 바라진 않았는데...’
100원짜리 하나면 족하겠지만 100원자리가 없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문은 이미 열렸고 나는 그것들 보고야 말았다.
가계방에선 이미 밥상 물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하고. 급한 김에 눈에 띄는 대로 천원짜리 하나를 가방에 쑤셔 넣었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천원은 100원보다 많은 돈, 풍선끔을 더 많이 살 수 있는 돈인데도 전혀 기쁘지가 않은 거다. 유치원에서도 온통 신경이
천원짜리에 집중돼 제대로 놀 수가 없었다. 생전 처음으로 가져보는 천원짜리 지폐. 유치원을 둘러싼 내 세계에서 한번에 이 천원을
써 없앨 수 있는 길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이걸 어떻게 써야 다 쓸 수 있을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였다. 10원에 4개하는
검은 젤리 따위는 생각하지도 않았다. 하나에 10원짜리 바나나 풀빵을 배불리 사먹는다 해도, 쌍쌍바와 색색 풍선껌을 사서
덕선이와 나눠먹는다 해도...
아, 불가능한 일이다.
결국 여러명의 애들을 불러 모아 다시 동신문구사로 갔다. 모두가 먹고 싶은 만큼 집어 들었지만 가방에는 여전히 지폐와 잔돈이
수북 쌓였다. 볼이 터질만큼 단 것을 쑤셔넣고 씹으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내 마음은 기쁘지 않았다. 내일 또 이만큼의 돈을
써야 한다고 생각하니 잠도 제대로 오지 않았다. 어린 것이.
(여기서 벌써 쫀쫀한 내 싹수가 보였는지도 모른다. 커서도 절대 큰 돈 못벌 내 싹수가)
다음날.
몸이 제법 아팠다. 유치원 가자고 찾아온 덕선이를 혼자 보내고 나는 이불을 뒤집어 쓰고 하루 종일 집에 있었다. 덕선이네 집에
다시 가는 것도 무서웠고 돈을 써야만 한다는 강박에서도 벗어나고 싶었다. 사람의 기억장치는 참으로 신비하여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고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은 걸러내서 버린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가. 나는 그 남은 돈을 어떻게 썼는지 도무지 기억이
안난다. 기억나는 것은 다만 유치원 졸업식 때.
개근상을 받은 덕선이는 상장과 부상으로 국민학생용 가방을 받았지만 나는 그날 하루 결석하는 통에 그 가방을 받지 못했다. 유치원
졸업사진을 보면 그때의 기억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덕선이와 내가 나란히 군청색 유치원복을 입고 꽃다발을 목에 걸고 덕선이는
분홍색 가방과 상장을, 나는 상장만을 들고 찍은 사진. 그 뒤로 덕선이 엄마와 우리 엄마가 딸들의 어깨에 다정하게 손을 얹어놓고
서있다. 둘다 그때 최고로 유행했던 비로드 한복에 옷고름 대신 브로치를 달고서.
이날 만큼은 백대진네 미미미장원에서 고대기로 한껏 부풀린 멋쟁이 머리를 한 덕선이 엄마가 사진속에서 웃고 있다.
‘아줌마, 용서해주세요. 제가 그때 아줌마네서 천원을 훔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