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빈 아빠... 나, 사고 친 거 있어.”
모처럼 일찍 들어온 남편을 보자마자 나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화장실 문 앞 주저앉아 양말을 벗던 남편의 곱지 않은 시선이 서서히 나를 향했다.
“뭐냐...이젠?”
짜증스럽다는 듯 말하는 남편의 반응이 나의 성질에 다시 불을 지폈다. ‘뭐냐...이젠’ 이라니 내가 언제 그렇게 사고만 쳤다고... 날 ‘꾼’ 취급하다니... 당연히 화가 날 수밖에... 뇌리를 스치는 화는 곧장 말이 되어 나의 입 밖으로 튀어 나왔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내가 뭘 그렇게 사고 친 것이 많다고!!!”
“그렇지... 별로 없었지... 디카, 아빈이 장롱, 전기 압력밥솥, 위자, 애들 보험 밖에 없었지.”
뭐 낀 놈이 성낸다고 남편은 나의 반박에 그간 마누라가 벌였던 사고들을 이렇듯 세세하게 늘어놓았다. 사고 쳤어, 란 나의 말에 이젠 남편은 홈쇼핑 물건 하나 또 샀구나 하는 식으로 받아 드릴 정도가 되어 버렸다.
난 TV같은 것을 잘 보지 않았었다. 어쩌다가 본다면 다큐멘터리나 인간극장 같은 논픽션을 다룬 영상만을 봤을 뿐.
시간 틈틈이 친구들을 만나야 했고 아줌마들을 만나야 했고 아이들의 공부까지 봐주면서 나의 일(글쓰기)을 해야 됐기 때문에, 시간도 없었다.
딸이 초등학교에 들어가고부터 용량 오버된 컴퓨터처럼 따라주지 않는 머리로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었다. 짜증나고 복잡한 머리를 어쩌지 못하고 있을 때 TV가 눈에 들어왔다.
그때부터 드라마를 보게 되었고 그 이상 재미있는 홈쇼핑을 보게 되었다. 2년 전쯤 한창 디카가 판을 칠 때였다. 우리 집 카메라는 나의 부주의로 배터리 끼우는 부분을 테이프로 붙여가면서 사용하고 있을 때였다.
필름을 일일이 사서 낄 필요도 없고 찍은 사진을 바로 확인해서 볼 수 있다는 것이 여간 편리해 보일 수가 없었다. 경제적인 압박은 나를 며칠 동안 고민 속에 빠트렸다. TV는 그런 나의 마음을 알고 유혹이라도 하듯 하루가 멀다 하고 방송으로 나왔다.
나의 두 마음이 시끌시끌 싸워 됐다.
‘사버려. 기회는 이때지.’ ‘네가 정신이 있다면 그럴 수는 없는 거야. 그깟 카메라가 없다고 굶었니? 무슨 사진을 그렇게 찍을 일이 있다고 말이야.’ 하고 우왕좌왕 날리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린 결론은,
‘ 일은 저질러 버려야지. 이렇게 고민만 하고 있다간 죽을 때까지 변변한 살림하나 없을 거야. ’ 였다.
그날, 난 10개월 무이자로 470,000만원이 조금 넘는 그것을 배짱 좋게 사버렸다.
현찰박치기, 뉘어치기, 메치기 아니면 상대하지 않는 마누라가 처음 카드 무이자로 물건을 샀다는 말에,
“발전했다. 별로 좋은 발전은 아니지만...”
했었던 남편.
처음이 무서웠지, 다음부터 저지르기는 일은 좀 수월(?)했다.
남편은 그 뒤로 나날이 발전하는 나를 지켜봐야만 했다.
“아빈 아빠, 우리 전기밥솥 10년 넘게 사용한 거 알지? 냄새 나는 거야 어떻게 해 보겠지만...코팅 벗겨진 것은 좀 그렇다. 그게 모두 우리 입속으로 들어가서 쌓이는 거란 말이야. 저거 압력밥솥 싸고, 사은품도 괜찮네. 이때 한번 바꾸자. 응?”
하고 압력밥솥을 노래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집안에 그것이 들어와 있는 것을 봐야 했고,
“14년 된 아빈이 방에 장롱, 더 이상 나사 조일 때도 없어. 저것 문짝 잘못 떨어졌다가는 애들 발등 크게 다치고도 남지.”
했던 나는 며칠 지나지 않아서 다시 문제의 그것을 집안에 들였다.
그리고 머지않아 고장 나서 버려진 의자를 대신해 화장대 의자를 사용하는 아들의 불편함을 운운하며 말을 실천으로 옮겼던 난, 후로...
자라나는 아이들을 운운하며 보험을 타령했고 며칠 지나지 않아서 걱정거리를 말끔히 해소했다.
이러니 남편은 내가 홈쇼핑 보는 것을 대따 싫어할 수밖에.
하지만 24시간 나의 TV를 감독할 수 없는 남편은 들어 올 때, 마누라 입에서 “수금 좀 됐어?” 하는 말과 동등하게 “나, 사고 쳤어.”라는 말 또한 무서울 것이다.
며칠 전 마지막으로 사고친 물건은 주물후라이팬이다.
그동안 기껏 사봐야 세일 코너의 5천원짜리 후라이팬을 쓰거나 사은품으로 들어 온 것을 사용했었다.
하지만 문제의 엠보싱바닥(음식물이 달라붙지 않도록 제작 됐을 그것은 제 할 일을 잊고 낙지 빨판처럼 음식물을 잡아당기는 바람에 생선한번 구울라치면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은 잘 닦이지 않았다. 계란후라이 한번 만들어도 잡다한 색깔과 냄새로 아이들 먹일 때마다 여간 찜찜한 것이 아니었다.
이 사고 역시 남편의 뇌리 속에 마누라 사고 목록으로 들어갔을 것이고 나의 전과 기록으로 영원히 남을 것이다.
허나, 나 나름대로는 너무나 타당한 일이었음을 강조하고 싶다. ^^
결혼 전 입버릇처럼 했던 말들이 있다. 엄마는 어쩌다가 내가 힘들게 사는 것이 속상하면 한번 씩 그 말들을 상기시켜주시곤 한다.
“뭐?!!! 요일별로 타고 다닐 자가용을 7대씩 갖고 살겠다고? 수영장 달린 3층 저택 혼자서 쓰겠다고 했고, 또 뭐더라? 그렇지... 자가용비행기 두어대 사서 아빠, 엄마 한 대 주고 나머지는 너 타고, 가정부도 5명 둔다고 했냐? 정원사에 기사에 부릴 사람들도 많더만... 에휴...”
노인네 참으로 기억력도 좋다. 36년 쓴 머리도 전화기 들고서 전화기 찾는 빈 깡통 수준이 되어버렸는데... 그런 것은 빨리 좀 잊지...
철부지 시절 꼭 이루고야 말겠다던 그 꿈은 애 저녁에 물 건너간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은 꿈이 아니라 희망으로 아직 나의 마음속에 남아있다.
희망은 희망이고 난 아직도 갖고 싶은 것이 몇 개 더 있다. 그 말은 곧 저지를 사고 목록 리스트가 몇 개 더 남아 있다는 말씀.
그것이 뭐시냐...
전자사전 - 나 혼자만 사용해야 하는 것이기에 참고참고 또 참고 있지만... 조금만 여유 되면 꼭 사고 말테다.
스팀청소기 - 침대나 이불, 베게 속에서 기승을 부리고 있을 그것들, 바닥에 살아 있을 온갖 세균들을 초전박살을 내고 싶다. (그러고 보면 참으로 난 깔끔한가보다. 찔리는 것은 왜일까...)
이 두 가지 상품을 내 머릿속 장바구니에 넣어 놓은 지... 오래다.
‘남아일언중천금’ 못지않게 ‘여아일언중만금’을 부르지는 나이기에 상황을 봐서 곧 저지를 심산이다.
악어 백이나 귀금속 같은 사치품도 아니고 정말 필요로 해서 구매하는 것이지만 솔직히 남편의 눈치가 사정없이 보이기는 한다.
방송국에서 상품으로 왔던 빨강 범낭 냄비 셋트를 불안한 눈길로 바라보던 남편의 속은 까맣게 타 있을지도 모른다.
난, 내가 아들 둘에 딸 하나 키우는 마음으로 산다. 하지만 남편은 아들 하나에 딸을 둘 키우고 있다고 우기면서 산다.
그만큼 서로에게 애물단지란 뜻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