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감정이 남아 있냐 물으면 부질없다 말했습니다.
내게 사랑할 대상이 있냐고 물으면 믿을 수 없다했습니다.
내게 남아 있는 것은 남을 믿지 못하는 마음과
차올라오는 욕심을 버려야만 하루를 살아갈 수 있다는 현실과
자꾸 자라는 열정을 비워야만 한달을 버틸 수 있다는 것만 알고 있었습니다.
보지 않았습니다.
눈앞에 보이는 나무만 보았습니다.
버렸습니다.
발아래 피어 있는 꽃이름만 간직했습니다.
소유했습니다.
내게 주어진 한 움큼의 시간만 내 곁에 두었습니다.
간직했습니다.
사랑했다 말하던 그 진실만 가슴 한쪽에 쑤셔 넣었습니다.
행복은 없었습니다.
보통사람이 갖고 있는 낮은 울타리도 나는 없습니다.
가난 했습니다.
남들이 가지고 있는 낡은 차도 나는 없습니다.
불행했습니다.
떠나보낼 사람 떠나보내고 홀로 밤길을 걸었습니다.
슬픈 음악 크게 틀어놓고 울 때가 더러 있습니다.
신경질이 나서 설거지를 하다 접시가 이가 빠졌습니다.
우울해서 늦게까지 낮잠을 잤습니다.
살고 싶지 않아서 청소도 하지 않았습니다.
사는 것이 재미없어 텔레비전 리모콘만 뒤적거렸습니다.
말이 없습니다.
말을 많이 하면 머릿속엔 텅 빈 후회만 남습니다.
먹지를 않습니다.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슬픔 때문에 음식 들어갈 자리가 없습니다.
잠이 오지 않습니다.
억울해서 온 몸의 세포가 살아 날뛰고 있습니다.
빗소리를 듣다가 설탕 많이 넣은 커피 한잔으로 날 달랩니다.
낙엽이 지면 멈춰 서서 나무를 올려다보며 혼자 떠듭니다.
들꽃을 보면 친구를 만난 것 같아 환하게 웃기도 합니다.
개를 만나면 잃어버린 멀건이가 불쌍해 물끄러미 쳐다봅니다.
과일 노점상을 만나면 과일 장사를 했던 엄마가 안쓰럽습니다.
돈이 없습니다.
그래도 난 걱정하지 않습니다. 고향 가서 땅 파먹고 살 자신 있거든요.
약골입니다.
그래도 난 건강합니다. 산 몇 봉우리쯤 넘을 수 있거든요.
중년입니다.
그래도 난 소녀마음입니다. 화장을 하고 집시치마를 입고 꽃 길을 걷고 싶거든요.
오늘 오후에 가요를 크게 틀어놓고 창밖을 한참 내려다 봤어요.
플라타너스 가로수가 색이 바래고 있었지요.
하늘은 잔뜩 흐려서 비를 뿌릴 것 같았지만 비는 내리지 않았어요.
근데, 내 눈에서 빗물이 떨어지데요.
다시 감정이 살아났음을 알았습니다.
남들이 슬프다고 우는 연속극을 봐도 눈물이 나오기는커녕 비웃기만 했거든요.
남들이 관심도 안 갖는 흔한 풀꽃을 보면 난 가슴이 벌렁거리거든요.
남들이 욕심을 내서 사는 로또를 한번도 사지 않았어요.
누군가가 로또를 한 장 사줬는데, 맞춰보지도 않고 쓰레기통에 버렸거든요.
흔하지 않은 감성을 갖고 난 다시 누군가를 바라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리움에 빠져 눈물을 흘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싸우고 싶습니다.
싫어 싫다고 하면서 소리도 지르고 싶습니다.
화도 내고 싶습니다.
너 까짓게 뭔데 하면서 차 문을 열고 뛰어 가고 싶습니다.
보고 싶다 말하고 싶습니다.
다시는 볼 수 없는 대상일지라도 깊숙한 정신에서 나오는 감정을 창공에 날리고 싶습니다.
보고싶다...................
그것이 비록 허공 속에 떠돌다 그림자도 없이 사그러지드라도
그것이 비록 낙엽 되어 바닥에 흩어지다 쓰레기가 될지라도
그것이 비록 눈처럼 녹아 하수구속에서 썩어갈지라도
그것이 비록 가을로 떠나가서는 살을 저미듯 아픈 겨울일지라도...
난 다시 감정이 살아나서 눈물을 흘리고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내며 뛰어 가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