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휴 첫날 새벽 1시에 잠을 깨워 준비를 한 뒤
차에 타고 출발한 시각은 새벽 3시 40분께였다.
비가 온대서 평소답지 않게 부지런을 떨었다.
경부선을 버리고 중부내륙고속을 타기로 했다.
새로 개통한 도로는 차도 드문드문 보였고
양옆으로 구비구비 병풍같이 펼쳐지는 산들과
어스름한 신새벽의 산봉우리에 볼레로마냥 살짝
걸쳐진 조각구름인지 안개인지가 환상적이었다.
괴산 휴게소에서 가져간 삼각김밥과 삶은 계란
아침을 먹고 이후(6시35분) 내가 운전을 하였다.
높다란 다리 위에 쭉 뻗어나 있는 쾌적한 길은
엑셀 위에 놓인 발에 자꾸만 힘을 주게 하였다.
남편에게 쿠사리를 먹어가며 머리에서 아드레날린
이 퐁퐁 솟는 것을 느껴가며 쉬지 않고 내쳐달려
8시 40분께 시댁 대문 앞에 차를 대었다.
도착하자 마자 옷을 갈아 입고 시엄니와
막내동서랑 차례음식 준비에 들어 갔다.
꼬치를 끼우고 전유어를 굽고 산적을 굽고
생선을 굽는 동안 동서는 나물준비를 하였다.
둘째네 가족이 도착하고 미꾸라지 추어탕으로
점심을 먹은 뒤에 송편을 빚었다.
이번에 팥 대신 녹두로 속을 넣었다.
강원도 감자떡처럼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
만든 것, 반달 모양, 조그만 만두 모양(나)
각자마다 다른 심미안을 가지고 만들었다.
한 숨 자고 일어나서
갈비와 전과 나물과 묵과 추어탕으로
저녁을 해서 먹고 추석 즈음에 둘이나 있는
아이들 생일을 케잌을 사다가 축하해 주었다.
맥주를 한잔씩 먹고 나서 노래방 가자고
충동질에도 노는데는 거의 중인 시동생들.
이튿날 아침 일찍 일어나 차례 준비를 서둘렀다.
제기를 꺼내고 병풍을 치고 상을 펴고
제기에 차례 음식을 정성스레 담아 내었다.
모두가 한복으로 갈아 입고 차례를 지냈다.
마음을 다하여......
차례상을 정리하고 아침을 먹었다.
모두들 내가 해온 갈비과 아침에 한 잡채가
맛있다며 난리도 아니었다.
내가 먹어봐도 뭐 맛은 있었다. ㅎ ㅎ ㅎ
설겆이를 끝낸 뒤 커피를 마시면서 한숨 돌린 뒤
차에 나눠 타고 성묘를 하러 산소를 향해 출발.
산소가 있는 야트막한 산 아래 흐르는 시내가
물이 엄청 불어나 계곡처럼 흘러 가고 있었고
얼기설기했던 나무판자 다리는 떠내려 가고 없었다.
태풍 나비의 영향으로. ㅠ.ㅠ
콸콸거리며 세차게 흘러가는 시냇물 가운데
조그만 바위를 징검다리 삼아 멀리뛰기를 했다.
아슬아슬 조마조마하였지만 성공.
무성한 수풀을 헤치며 가야 했던 산소 가는 길은
그간 쏟아진 폭우의 덕을 톡톡히 본 듯 했다.
잔잔하고 어여쁜 들꽃들도 곳곳에 무리지어 피었고
전에 밭이었던 곳도 잡초림이 되어 있어서
자연의 끈질긴 생명력이 무섭다 하니 누군가
사람 발길이 더 무서운 거라 하여 웃었다.
약간씩 흩뿌리는 가랑비를 맞으며 성묘를 하고
서둘러 내려 왔다. 시냇물을 건너다 기어이
한발이 미끄러져 물에 빠졌다.
신발을 벗고 맑은 시냇물에 발을 담그고 앉으니
너무 시원하여 좋았다.
황금들판이 되어 가고 있는 논둑 옆에 자리를
펴고 시내에서 놀던 아이들과 싸 온 음식을
먹었다. 다들 너무 잘 먹어서 음식을 적게 싸온
것을 후회할 정도였다. 하지만 들판에 진동하는
벼익는 구수한 냄새가 나머지 허기를 달래 주었다.
주위에 사시는 친척 댁에 들러 인사를 드린 다음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근처에 있는 절에 들러
산책을 하였다. 대웅전 앞뜰에 천년 이상을 굳건히
서있는 두 석탑위에 때마침 석양빛이 물들고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 성이 안차 가슴에 새기듯
카메라 셔터를 연신 눌러 대며 사각 프레임 안에
석탑의 자태를 꽉 채워 탐욕스럽게 바라보았다.
허기진 내 마음을 채웠다.
돌아와 저녁을 먹은 뒤에 작별의 인사를 하고
30-40분 거리의 친정으로 떠났다.
친정에는 가까이 사는 동생 가족이 벌써 와 있었다.
시댁에서 조퇴를 시켜 주었다나.
아버지가 아이들 셋을 데리고 노래방에를 가시고
제부가 남편을 데리고 슬그머니 나가 버리고
엄마와 나, 동생 셋이서 얘기를 했다.
엄마가 막내 때문에 걱정이 한 보따리다.
재결합을 은근히 바라는 이야기마저 하신다.
내가 그런건 꿈도 꾸지 말라며 냉정하게 얘기했다.
엄마는 섭섭한지 고만 얘기하란다. 걱정도 말라 한다.
항상 이런 식이다. 자기 이야기를 쏟아 붓고는
남의 얘기는 듣기 싫다 한다.
대화란 주고 받는 것인데 그런면에서 나랑은 안 맞다.
내가 얘기하고 싶은건 결혼을 하고 안하고는 두번째이고
자신의 생활력이 더 중요하다는 거였다.
문제를 외부의 힘으로 쉽게 해결하려 해서는 안되며
자신의 힘으로 스스로 해결해 가야 함을.
이미 성인이 된 동생의 문제는 누구도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동생에게 펼쳐질 미래는 어떤 모습으로 다가 올까.
아직도 자식걱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부모님의 모습도
안타깝고 측은하기는 매한가지였다.
동생은 피곤하다며 제 집에 가서 쉬겠다 하고
제부와 남편이 술을 마시고 있다는 술집에 나도 끼었다.
엄마를 불러 내어 넷이서 노래방에 갔다.
노랫 속에 못다한 얘기를 풀어내어 소리질러도 외쳐도 보고.
집에 돌아와 자려고 누우니 크고 둥근 보름달이
어둔 밤하늘에 휘엉청 떠서 환히 빛나고 있었다.
오래도록 보려 했는데 금새 까무룩 잠들고 말았다.
다음날 늦게 일어나 아침을 먹고 쉬다가
엄마가 싸주는 미역, 다시마, 멸치, 김, 고기, 식혜를 싣고 동생 가족의 환송을 받으며
저녁 느지막이 출발하였다.
휴게소에서 싸간 도시락을 맛있게 먹고 다시 열심히 달려서
6시간만에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해피한 추석을 보내고 왔지만
동생 때문에 맘 한구석이 짠한건 어쩔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