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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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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류의 눈물


BY 토네이도. 2005-08-24

2005년 8월 20일 5시, 난  공주올케 모시고 사는 남동생에게서 한통의 문자를 받았다.

'씨팔년아~~평생 나 볼 생각마. 잘난 그 새끼(매형)랑 잘 먹고 잘살어. 하류들아~"

 

우리집은 가난했다.

아버지는 일정한 직업이 없었고 우리는 굶을때가 많았다.

내 어려서 소원은 밥 한번 실컷 먹는거였다.

내가 초등학교 5학년이되어서야 우리 밥상에 엄마밥이 없다는걸 알았다.

어린동생들은 아직 아무것도 몰랐지만  사남매의  맏딸이던 나는 남는 밥이 있어야 엄마가 굶지않는다는걸 알았다.

밥을 남기는 일은 무척 힘이들었다.

 

그런가운데서도 엄마는 자식들이 배워야 이 가난의 굴레를 벗어난다고 생각했나보다.

밥을 굶어가면서도 우리는 학교를 다녔다.

그중 부모님이 우리집 맏상주라며 특별이 아꼇던 큰 남동생은 공부잘하고 똑똑했다.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난 실질적인 우리집 가장이 되었다.

한참 멋부릴나이에 난 옷한벌 제대로 사입을수도 없었다.

큰남동생이 대학때 알콜 중독이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난 명실상부한 가장으로 승격했다.

그 무렵 난 옷장사를  시작했고 하늘이 도와서인지 가게는 나날이 성황을 이뤘다.

덕분에 더이상 끼니 걱정은 하지않았도 좋았다.

내겐 지병이 있어 결혼은 생각도 할수 없었다.

내가 사는 이유는 우리집이 일어서는것이었다,

그래서 엄마가 더이상 힘들지 않은것이었고  유일하게 사년제 대학에 다니는 큰남동생에게 그 기대를 걸어 모든 지원을 아끼지않았다.

 

큰남동생이 미국연수를 원했다.

아버지돌아가시고 바로여서 적적한 엄마를 생각해 미뤄주길  간청했지만 듣지않았다.

미국을 보내면서  너무 혼자생각만한다고 느꼈지만 아마 그건 서운한 마음때문이었을거다.

난 동생을 무척 사랑했었으니까..

 

그즈음,나도 현재의 남편을 만나 결혼이란걸 하게되었다.

결혼을하고도 난 우리집의 가장이었다.

 

미국에서 돌아와 복학한 동생은,

언제 터질지모르는 시한폭탄같았다.

젊은혈기가 만들어내는 말썽이었겠지만 모든 말썽에는 돈이 들어가는것이어서 난 가게를 하며 남들보다 좀더 번다해도 메이커 옷한벌 못사입기는 마찬가지였다.

차를 사고, 음주운전을 하고, 걸려서 벌금이 채 나오기도전에 또 음주 , 무면허 상태에서 인사사고...도대체가 감당이 안되는 사고의 연속이었다.

싸움..합의..카드빛...빌고, 찾아다니고, 돈들어가고,법적책임을 피하기위해 권모술수까지...

모든 뒷감당은 내 책임이었다.

 

그런 동생이 장가를 갔다.

장가를 가고 동생은 달라졌다.

모든 말썽과는 졸업이고, 아이라면 깜빡죽는 성실한 가장이 되었다.

 

 올케는 대학때부터 사귀던터라 우리집에 몇년을 다녔기때문에 마치 이쁜동생같았다.

별루 어려움 모르고 자란 올케는 가난에 찌든 우리집을 얕잡아보는듯했다.

우리집은 산동네 지금은 헐려 없어진 아파트다.

올케는 몇년간을 엄마가 차려다주는 밥상을 앉아서 받아 먹었다.

첨와서부터 약혼하고도 결혼 날짜 잡아놓고도 결혼후 다니러와서도..(결혼후에는 밥먹은후 설거지는했다.)

그런 모습이 동네사람 입에 오르내릴때마다 난 아마 귀하게 자라서 재래식 부엌에 들어갈 엄두가 안나나보다고 했다.

 

엄마 집이 헐리고 중계동에 아파트가 엄마 앞으로 배정됐다.

그집으로 동생이 들어온다고 했을때 난  크게 반대를 했다.

그동안 보아온 올케의 공주근성때문이었을거다.

남들은 같이 살다가도 따로 나가는데 따로 나가 살다 왜 들어오냐고..아직 엄마도 젊으니까 서로 편하게 살자고...

 

지금은 자기사업을 해서 하늘 높은줄 모르는 동생은 그때는 말단 신입사원이었다.

엄마의 아파트로 동생이 들어왔다.

그때부터 엄마의 공주모시기는 시작됐다.

22평 방두개에서 올케는 전화조차 같은 번호로 쓰기 싫었나보다.

난 아직도 엄마랑 같은집 동생방 전화번호를 모른다.

손님이 오면 올케는 문을 닫고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엄마집에 엄마친구들이  올케 눈치보느라 못오고 친척들도 자연 우리집으로 많이 모였다.

 

동생은 사업을시작해 돈을 벌었다.

엄마에게는 재개발 아파트를 비우고 받은 상암동 아파트 입주권이 있었다.

동생돈과 엄마의 상암동 아파트를 전셋돈을 합쳐 동생은 50평아파트로 이사했다.

남들보기에 우린 성공한 가족이다.

 

최근 올케의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엄마집에 지들이 들어와 살아놓고 엄마를 모셨다고 유세했다..

지들 돈으로 아파트를 얻어갔기때문에 그런가부다 싶었다.

늙어서도 돈없으면 자식들한테 괄세 받는다는 이야기가 이거구나 싶었다.

엄마의 며느리 모시기에 울화통이 터진 나였지만

새침하고 쌀쌀맞은성격탓이라..타고난 성격을 어쩌겠나 하며 스스로를 달래왔었다.

그래서 십수년 어린 올케와 난 친자매처람지내왔다. 메세지오기 바루 전날까지..

엄마한테 하는것만 빼면 난 어린 올케가 이뻤다.

 어느새 삼십대 중반을 넘어선 올케지만 내겐 아직도 처음 본 대학생때 모습으로 남아있다.

시집온지 십년이 넘어도 나물한가지 못무친다는 올케지만 말이다.

 

 

내가 가게를 접으면서 부터, 즉 내가 동생에게 아무런 경제적 보탬도 되지못하면서부터 동생은 달라졌다.

내게 반항했고, 나아가 함부로 했고, 돈벌면서부터 멸시했다.

난 동생 대하기가 껄끄럽고 무서웠다..

동생에게 모멸감을 느끼면 내 살아온생애를 한탄하며 회한에 젖었기 때문이다.

내 자식들에게보다 더한 열정으로 모든것을 주어 왔던 동생.

그래서 이젠 자식들에게 줄건 남아있지도 않은열정.

한이 무엇인지 알거 같았다.

 

 

올초 난 엄마의 부름을 받고 동생집에 갔다가 동생의 빈정거리는 소릴 들어야했다..

분해서... 돌아버릴거 같았다.

 집으로 돌아온 난 요리하려고 켜놓은  가스불  위로 쓰러졌다.

얼굴에 심한  화상을입었다.

한달 입원하고 수술하고 망가진 얼굴로 살아갈 세월에 대한 버거움으로 눈물짓고 있을때 바쁜동생이 들렀다.

미국 출장길에 들렀다고.

아이들 방학하자마자 미국으로 떠난 올케에게 동생은 출장갔다.

여동생이 중얼거렸다.

"거짓말인지 누가 몰라. 미국출장가는 놈이 주말에 간대? " 나중에 조카 말을 들어보니 동생은 라스베가스 카지노루 출장을 갔었나부다.

 

대천사는고모집에 여름휴가 떠난 동생이 부부 싸움을했다.

철없은 것들이 암 을 앓고있는. 고모앞에서 사소한일로 다퉜나보다.

그다툼끝에 올케는 엄마한테 대들었단다.

왜 가만있느냐고,, 내가 딸같아도 그러겠냐고,.

그모습을 본 고종사촌은 고모랑 같이 걱정을했단다.

외숙모 같은이가 세상에 어딨다고 이제 며느리 눈치보게 됐다고..사촌동생은 내게 말했다.

언니가 그렇게 사납지는 않은줄알았드니 보통아니드라면서.. 어떡하면 좋으냐고..

 

이틀뒤 동생네는 또 부부싸움을했다.

바람을 핀건지 바람핀다고 오해를 한건지 모르지만 그런 내용의 부부싸움끝에 엄마는 또  벼락을  맞았다.

 그대로 두면 안되겠다 싶어서 올케를 찾아갔다.

커피한잔 마시면서 얘기햇다.

너희들 부부싸움에 엄마 끌어들이지마라.

넌 올케가 없어서 모르겠지만 올케가 엄마한테 함부로 대할때 얼마나 속상한줄아니?(이말은 동생집을 나온뒤 5분뒤 동생한테 항의전화를 받은말이다. 장모 아들 못낳는 약점을 왜 얘기하냐고..ㅎㅎㅎ)

신랑이 미우면 시어머니가  보기싫은것도 이해는 가지만 그렇다고 신랑이 남보다 잘벌고 잘써서 누리고 다닐때 시어머니께 감사하는것도 아니지않느냐.

내 서방이 잘나면 내팔자 좋은거고  내 서방이 속썩이면 당신아들때문이고  이러진 마라..

평상시 언어보다 낮은 말투로 ,그러나 생전안하던 비위에 거슬리는 얘기이기때문에 조심스레했다.

 

동생집나온지 10분이 채안돼 동생으로부터 전화가 빗발쳤다.

무슨말로 애를 잡았냐는 어투로~~

 우리가 나가자말자 동생한테 울며불며 소리치며 전화를 했단다.

동생이 퇴근하자 마자 올케는 쓰러졌단다.

동생 얼굴을 보자 실어증에 걸렸다고 했다

모든것이 한두시간안에 폭풍처럼 몰아친일이다.

 

날 험한 소리로 호출 했을때 난 걱정이 되서 이미 동생집 대문앞에 와 있었다..

올케는 안방에 누워서 컵을 손에 쥐고 눈물을 흘리고있었다.

기가 막히다가도  막상 올케를 보니 불쌍한생각이 들어 손을 잡고 눈물을 닦아줬다,

머리를 쓰다듬으며말했다" 뭐가 그렇게 속이 상했어? "

올케는 진짜로 말이 안나오는듯했다.

"억지로 말하려고 하지말고 다음에 해..누워있어. 괜찮어.

눈이 동생과 마주치는 순간  난 적의를 느꼈다.

 내가 자기 마누라 그렇게 만들었다고, 당장 나가라고 소리쳤다.

엄마는 니가 모시든지 아니믄 어찌되든 상관말라고 했다.

항상 그랬지만 자기 마누라앞에서 어린아이 야단치듯이었다.

화가 치밀어  난 제정신이 아니었다.

"너 지금 마누라 맘 풀어줄려구  마누라 앞에서 야단쳐줄려구 누나 부른거야? 내가 니마누라한테 무슨 말을했다고 실어증이야?

세상 사람들이 다 니마누라 성질 같다면 동생한테 모멸당하는 난 벌써 사망신고 냈겠네?

힘들게 아들키워 장가보내놓고 그며느리가 눈 똥그랗게 뜨고 포악떨면 당하는 엄마는 또 어떻게 됐겠어?"

 

갑자기 올케가 소릴 질렀다.

"포악이요? 포악이요? 으악~~"

홧김에  동생한테 한말이지만 내말이 심햇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올케랑 대화할땐 맘 상하지않게  좋게 얘기하느라 듣기 험한 단어는 쓰지 않았지만, 그 내용이 자기 잘못을 꼬집는 내용이라 자기 성질을 어쩌지 못해생쑈를 벌이는 판에 "포악"이란 단어는 불을 질렀다.

난 올케의 그런 모습에 측은한 마음까지 사라졌다.

상종못할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동생집에 머문 시간은 불과 5분여..

 

남동생은 오래전부터  내 맘속엔 없는 동생이었다.

엄마 살아계실 동안만 아무렇지도 않은듯 얼굴 보는 시한부 동생이었다.

 

 

분해서 잠이 안왔다.

막내동생집에 전화를 했다.

막내올케가 받았다.

"큰형님 어찌됐어요?"

"큰 형님이 왜?"

"그제 새벽 세시에 전화가 왔어요. 이혼한다고. 화가 나서요. 그래서 무서워서 전화두 못해봐요. 궁금한데.."

난 순수한 막내올케가 눈물겹게 고맙고 이뻤다.

"너두 내가 잘못했다고 지적하면 신랑한테 난리치고 시어머니 미워할거지?"
"아뇨. 난 얼마나 감사하는데요. 얘기들어보믄 심한 시어머니 시누이가 많든데 우리 시어머니같이  좋은분 형님들 같이 좋은분만나게되서요."

 

참으로 순수해서 사랑받는 막내의  이야기를 들으며 분이 조금은 풀렸다.

새벽에 동생한테서 메세지가 왔다.

포악이란 말로 충격을 받아 응급실에왔단다.

언제 나을지 모른다는 의사말이있었다고 당분간 오지말라고..(동생집이 가까워도 난 명절때외에 거의 가지않는다. 엄마가 계시지만 편치않았다.)

 

그담날 올케한테 별의 별 소리 다 들은 동생한테 메세지가왔다.

"씨발년~~ 나 볼생각하지말고 살아. 하류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