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결혼을 하자 어머니께서는 옷을 한벌 준비하셨다.
하얀 바지 저고리와 두루막까지, 내가 결혼하기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옷이었다.
신랑과 나는 신혼여행을 막 마치고 아버지 산소를 찾아갔다.
새 신랑과 새 색시의 차림으로,
길을 안내하겠다는 오빠의 도움도 만류하고
둘이서만 찾아가는 산길은 호젖하기 그지없이 좋았다.
산을 한참 올라가다 아버지 무덤을 찾아내고 신랑과 나는 다소곳이 절을 했다.
"아버지 이 잘난(?) 딸내미 신랑 델고 왔어요,"
마냥 행복에 겨워 산소를 돌아보니 누군가 갔다 놓은듯한 술병과 그릇이 보였다.
예사로 생각하고 무덤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논이 있어 그 곳에서 아버지 옷을 태웠다.
아버지께 세째 사위가 드리는 인사를 잘 받아주십사고 재잘되면서,
친정집에 내려와서 묘지앞의 술병과 묘지 얘기를 하니 어머니께서 그런일 없다시며
혹 다른 곳에 간것 아니냐고 물으셨다.
내가 우리 아버지 산소도 모를 줄 아냐고? 기분 언짢아 하니 엄마도 별 말씀이 없으셨다.
할 일을 했으니 까마득히 잊고 우리 신혼집에와서 며칠이 지났을까 남편은 출근을 하고
혼자 낮잠을 자고 나서 멍하니 앉아 있는데 아버지가 하얀 바지 저고리에 두루막을 입고
내 눈앞을 지나가시는 것이었다. 아주 짫은 순간이었다. 아버지가 옷을 잘 입었다고
보여주시는 거라고 생각하고 저녁에 남편이 퇴근하자 소식을 전했다.
그 후로 아이도 태어나고 초보 주부생활에 정신없이 시간을 보냈다.
이듬해 추석이 왔다. 우리 형제들은 친정에 모여 아버지 산소를 갔다.
그런데,
남편과 둘이 옷을 태우던 그 무덤을 지나 한참을 더 올라가는 것이었다.
내가 결혼하기전해 경지정리가 산 밑에까지 이루어져서 내가 착각을 한 것이다.
아버지 무덤은 한참을 더 올라가서 똑 같은 위치로 반듯이 자리 하고 있었다.
내가 새 색시로 신랑을 데리고 인사를 갈때 아버지는 얼마나 애가 탔을까?
아버지 산소도 못 알아보고 남의 묘지에 절하는 이 딸을 아버지는 미리
다 용서하시고 안심시켜 주신 것이었다.
훗날 잘못을 알고 이 딸이 많이 놀랄까봐 그래도 옷을 아버지께서 입고 가셨다는 흔적을
나에게 보여주신 것이다.
비록 남의 무덤에 절을 했지만 남편과 나의 마음은 편안 할 수 있었다. 내가 어느곳에 사는지 어떻게 아시고 훗날 내가 깊은 후회를 하고 가슴을 칠까봐 아버지의 영혼이 옷을 입고 보여 주신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남의 산소에 절하고 그 앞의 논에서 산소쪽을 보고 옷을 태웠어도 아버지께서 입고 가셨음을 100% 확신한다.
나이 마흔이 넘어서 귀신이 있다 , 없다의 두려움에 휩싸이는 일이 있었다.
죽음 이라는 의미가 새삼스레 와 닿고 이렇다더라 저렇다더라의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들이
스처지나지 않고 귀에 머무는 적이 있었다. 어릴때 보다 훨씬 두렵고 힘이 들었다.
지나고 보니 나이를 먹어도 아니 더 많아서 할머니가 되어도 모를수도 있을 자질구레한 일들이 그때는 주저앉을 만큼이나 흔들리게 했다.
신혼집을 찾아주신 아버지의 영혼은 전혀 무섭지 않았는데 남들의 이야기는 어른도 참 두려움에 떨게 했다. 지금 생각하면 난 참 순진한 아줌마 였구나 싶기도 하다.
왜 사람들은 말하기도 듣기도 흉흉한 '귀신'이라고 칭할까? 나는 영혼이라고 하고 싶다.
적어도 내 조상, 내 아버지의 영혼은 언제나 자식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기 보다는 살아서나 죽어서나 평온하게 살 길 바라는 따뜻한 내 아버지이리라.
세월이 20년이 흐른 지금도 남편에게 가끔씩은 놀림을 받는다. 그럴때 마다 나는 큰 소리를 친다. 우리 아버지가 옷을 입고 간다고 나에게 증명해주고 가셨다 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