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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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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연애가 제일 어려웠다.


BY hayoon1021 2005-08-14

 

1998년 겨울, 자정이 다 된 시각에 그의 전화를 받았다.

그의 첫 마디를 들은 순간부터 내 가슴은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 몇 주 전에 헤어졌으므로 다시 전화통화를 하게 될 거라고는 전혀 생각 못 했기 때문이었다. 그게 첫 헤어짐은 아니었다. 2년 남짓 사귀는 동안 몇 번 헤어졌다 만나기를 반복해 왔다. 하지만 이번은 진짜였다. 번번이 내가 먼저 화해를 청했던 우리의 관례상 내가 침묵하면 우리 관계는 그대로 끝나게 될 것이므로.

도저히 내 인생에 일어날 것 같지 않던 일, 사랑이 내게로 왔을 때 난 굶주린 개처럼 달려들었다. 체면이고 자존심이고 다 팽개쳤다.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정녕 세상에는 내가 몰랐던 또 다른 세상이 있구나 싶었다. 그러나 뜨거운 우리 사랑은 석 달을 고비로 점차 꺾여들었다. 먼저 호감을 갖고 다가왔던 그는 내 성격을 감당할 자신이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내 귀에는 이미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슬프게도 그 이후의 우리 사이는 내가 힘겹게 끌고 그는 마지못해 따라오는 꼴이 되었다. 끈질긴 내 사랑을 그는 집착이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헤어지던 날, 우리는 크게 싸웠고 몇 시간째 침묵으로 맞서고 있었다. 그가 이제 정말 끝내자는 말로 그 침묵을 깼을 때, 난 머리 쥐어뜯고 싸우다 기운을 다 한 여자처럼 선선히 그 말에 동의했다. 그의 자취방을 나와 버스를 기다리는데 의외로 마음이 담담했다. 매서운 찬바람을 정면으로 맞으며 이 겨울만 잘 넘기면 될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겨울이 다 가기도 전에 그가 불쑥 찾아온 것이었다. 쿵쾅대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나는 냉정하게 전화를 받았다. 나가지 않겠다는 내 대답에 그는 올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했다.

늦은 귀가를 서두르는 사람들 사이로 겨울나무처럼 그가 서 있었다. 그는 얇은 면 티에 낡은 스웨터 차림이었다. 두툼한 롱코트로 몸을 감싼 나도 덜덜 떨 만큼 지독한 추위에 허술한 옷차림을 한 그를 보니 그저 기가 딱 막혔다. 그가 나를 발견하고 희미하게 웃었다. 그는 지금까지의 일을 나한테 사과했고 앞으로 노력하겠다고 했다. 난 여왕처럼 거만하게 그의 얘기를 듣고 있었다. 그가 나한테 매달릴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그 일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었다. 이로써 나는 그에게 채인 것이 아니라 내가 그를 찬 셈이 되었다. 그 통쾌감은 그때까지의 내 굴욕감을 충분히 보상해 주었다.

그는 어디든 들어가서 얘기하자고 했지만 난 거절했다. 당신과 마주앉아 술이든 커피든 이제 마실 이유 없어. 그렇게 말은 차갑게 했지만 속마음은 당장이라도 따뜻한 데 들어가 얼어붙은 그의 몸을 녹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주머니엔 잘해야 돌아갈 택시비 정도만 있을 게 뻔했고, 난 그 돈을 쓰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그날 그 밤거리에 서서 몇 분간 그의 애원을 듣고 있으려니 갑자기 모든 게 지긋지긋해졌다. 그 빌어먹을 추위도 싫었고, 막판에 약한 모습 보이는 그도 싫었고, 어정쩡한 내 처지도 싫었고, 특히 차 한 잔 맘 편히 마실 수 없는 그놈의 가난은 꼴도 보기 싫었다. 나는 손을 번쩍 들어 지나가는 택시를 세워버렸다. 택시 문을 닫는 순간까지도 그는 절박하게 내 이름을 불렀다. 

밤 작업을 하는 한두 사람의 책상에만 불이 켜져 있을 뿐 화실은 조용했다. 살금살금 방으로 들어가 며칠 전 여자들끼리 먹다 남은 소주를 찾아 병째 들이켰다. 내가 진심으로 소주를 원했는지 어쩐지는 모르겠지만 그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위안인 건 분명했다. 반병 정도를 물처럼 마시고 나는 이층침대 위 칸으로 올라갔다. 자리에 딱 눕는 순간 머리가 띵 하면서 몸이 막 빙글빙글 돌았다. 머릿속이 와글와글 시끄러워졌다. 자리에 누우면 닿을 듯이 천정이 바로 눈앞에 보이는데, 그 천정이 그대로 내게 덮쳐올까 봐 겁이 났다. 산소가 부족한 것처럼 답답하고 숨이 막혔다. 이층침대랑 소파 하나만 달랑 있는 좁은 그 방은 화실에서 지내는 여자들 셋의 보금자리였다. 한데 아늑했던 그 방이 그날은 감옥처럼 느껴졌다.

동료들이 방으로 들어왔다. 난 등을 돌리고 잠든 척 했다. 그들은 늘 해왔듯이 소파에 앉아 하루의 피로를 수다로 풀기 시작했다. 나도 지금쯤 저 속에 끼어 있었을 텐데, 망할 그의 전화만 안 왔어도 말이다. 그 수다는 한두 시간을 훌쩍 넘기기가 예사였다. 오랜 시간 동안 난 꼼짝도 하면 안 되었다. 서서히 온 몸이 뻣뻣해졌다. 그냥 일어나 내 심정을 털어놓아도 됐겠지만 그럴 기분은 아니었다. 그와 사소하게 다퉜을 때는 요란하게 떠들어댔지만 진짜로 끝이 나버린 이상 그 어떤 말도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눈물이 폭포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소리가 새나가지 않도록 용을 쓰면서 울다 보니 더 힘이 들었다. 소매가 다 젖어 나중에는 이불을 끌어다 눈물을 닦았다. 그를 완전히 떠나보냈다고 생각하니 미칠 것만 같았다. 그가 없는 세상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형체를 알 수 없는 두려움이 몰려왔다. 그 공포의 끝에는 나 자신에 대한 혐오감과 자학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리석은 것, 네 주제에 무슨 연애를 한다고? 만화를 그리고 싶어 올라 왔으면 한 눈 팔지 말아야지, 가뜩이나 재능도 없는 것이 꼴좋다! 그 사람 생각으로 괴로워하는 것보다는 날 공격하는 게 더 마음 편해서 나는 계속 스스로를 학대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그가 무사히 그의 방으로 돌아갔는지가 궁금했으니, 사람 맘은 참 알 수 없는 것이었다. 새벽이 올 때쯤 어느 정도 진정된 나는 다시는 사랑을 안 하리라는 독한 결심을 했다.

지금까지의 내 인생에서 그날은 가장 혹독한 기억 중 하나로 남아있다. 그는 내 성격이 힘들다고 했지만 그도 만만한 성격이 아니었다. 어느 한 사람이 좀 단순하거나 엄청 낙천적이었다면 순탄했을지도 모르겠다. 혹은 당시의 우리 처지가 헐벗은 문하생이 아니고 그럭저럭 자기 앞가림은 하는 직장인이었다면 얘기는 또 달라졌을지 모른다. 하지만 당시는 우리 사랑을 뒷받침해 줄 만한 게 아무 것도 없었다. 거기다 둘 다 나이만 먹었지 연애하면서 일어날 수 있는 문제에 대처하는 수준은 연애경험이 좀 있는 십대, 이십대들만도 못 했다. 분명 우리는 서로 사랑했으며 아름답고 달콤한 추억들도 많다. 하지만 그와의 연애시절 하면 아프고 괴롭고 쓸쓸했던 기억들만 툭툭 튀어나오는 걸 보면 그만큼 진저리쳐지는 연애였던 것만은 분명하다.

그날 밤 이후 극적인 반전을 거쳐 우리는 결혼했다. 나로선 인간승리였지만 가장으로서 버둥대는 그를 볼 때면 기어이 그의 모가지를 끌어다 결혼한 것이 과연 잘한 짓인가 싶을 때도 있긴 하다. 하지만 이것 한 가지는 분명하다. 그때 그대로 헤어졌으면 그 후의 내 인생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것. 그런 아찔한 상상을 하면 천만 번 지금이 낫다. 고단한 생활이지만 둘이서 함께라면 거뜬하다. 그러고 보면 가장 어려웠던 연애가 내 인생 최고의 은총이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