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때 친구한테서 메일이 왔다.
사연은 딱 한 줄이었다.
[미치도록 보고 싶다, 친구야.]
뭐 미칠 거 까지야... 그거 읽으면서 맨 처음 한 생각이다.
그건 분명 빈정거림이었다. 한 3년 만에 온 소식인데, 내 시들한 반응에 나도 놀랐다.
갑자기 날 찾는 걸 보니 뭐 힘든 일이 있나 보다... 두번째로 든 생각이었다.
이 친구는 고등학교때 몰려 다닌 친구들 중 제일 돋보이는 친구였다. 예쁘고 늘씬하고 공부도 잘 했다. 의지도 강해 여상 나와서 직장 다니며 2년 재수해 야간 대학도 졸업하고 공무원까지 됐다.
그렇게 입지를 굳히기까지 얼마나 심신이 고달팠을까?
하지만 친구들한테 별 감동을 얻어내지 못했다. 입시 공부할 때 친구들이 방해된다는 이유로 말도 없이 2년 동안 소식을 뚝 끊었던 친구다. 입학하고 나서야 그간의 일을 털어놨지만, 그때는 이미 친구들 마음이 상해버린 뒤였다.
대학 다닐 때는 또 그쪽 친구들하고 어울리느라 우리와 놀지 못했다.
드디어 그 친구가 졸업하고, 취직도 하고, 나름대로 여유가 생겨 나를 만나고 싶어했을 때는 내가 막 서울로 올라가려던 참이었다.
그 뒤 우리는 서로의 결혼식에도 가 줬고, 비슷한 시기에 아이들을 낳으면서 뜸하긴 해도 꾸준히 연락은 주고받았다. 그러다가 지난 3년 동안 연락이 끊어졌다.
난 이 친구한테 내심 화가 나 있었기에 먼저 연락하지 않았다. 난 친구가 나한테 했던 마지막 실수를 똑똑히 기억한다.
시동생이 서울에서 결혼하기로 했다면서, 이럴 때 얼굴이나 보자고 나한테도 오라고 했다.
자기는 열차를 타고 올테니 영등포역에서 만나자고 했다. 난 서울역이 우리집에서 더 가까와서 서울역에 내리면 안 되냐고 물었는데, 단호하게 안 된다고 했다.
어차피 역에 내려서 택시타고 예식장까지 갈 거고, 거리로 따져도 서울역이 더 유리한 것 같은데 친구는 길게 얘기를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작은 놈 업고, 모처럼 새 구두까지 신고 영등포역으로 나갔다. 가는 도중에 잘 오고 있는지 전화를 해봤다. 그런데 이 친구, 너무 싸늘한 목소리로 지금 기차 안이니까 통화 못 한다며 달칵 끊는게 아닌가? 황당했다. 누구는 기차 안 타봤나?
결혼이라는 큰 일을 치루자니 맏며느리로서 스트레스 받을 일이 많아 지금 뭔가 화가 나 있나 보다 생각하며 치미는 화를 꾹꾹 눌렀다.
근데 도착 시간이 지나도 친구가 안 나왔다. 그래서 다시 전화했더니 그 친구 남편이 받았는데, 서울역에 내렸다는 거다.
새마을호는 영등포역에 안 선다는 걸 나도 그들도 몰랐던 거다.
거기까지는 서로가 모르고 벌어진 일이니 넘어간다 치더라도, 나를 끝내 화나게 한 건 정작 그 친구는 내게 해명 한 마디 안 했다는 거다. 남편한테 좀 바꿔달랬더니 지금 애 안고 있어 통화하기 힘들다고 했다. 고의로 통화를 피하는 게 분명했다.
뭐 이런 경우가 있어?
그 사람 많은 역 한가운데서 아이를 들쳐 업고 한동안 난 허탈하게 서 있었다.
모처럼 신은 구두라 뒷꿈치가 까져서 피가 났다. 힘겹게 발걸음을 떼며 난 친구를 용서하지 않겠다고 마음 먹었다.
일주일이 지난 후 친구는 애기 옷을 사서 보내왔다. 그 날 미안했다고.
그 날은 제 기분대로 다 해놓고, 나중에 선물 하나 들이밀며 사과하면 될 걸로 그 친구는 생각했나 본데, 오산이었다. 친구니까 맘대로 대해도 된다고 누가 그랬나 말이다.
더 몇 년 전에도 이처럼 황당한 경우가 있었다. 한 친구가 충주에서 결혼을 하는데 나랑 그 친구가 가게 됐다. 나는 서울에서, 친구는 대구에서 서로 출발해 일정 시각에 충주 버스 터미널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런데 그 친구는 안 왔다. 그 날 오후 내내 난 터미널 대합실에 혼자 내버려졌다.
다음 날 결혼하는 친구는 그 날 바빠서 날 챙겨주지 못했다. 볼일 다 끝내고 저녁에야 날 데리러 터미널로 왔다. 그 친구는 그 날 밤 막차로 왔다. 이유는, 늦잠을 잤는데 이왕 늦은 거 잠이나 더 자자고 벌렁 누워버렸다는 거다. 그 얘길 변명이라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했다. 다들 이쁜 짓 한 아이 보듯 허허 웃었다. 친구하고 한 약속 같은 건 얼마든지 무시해버릴 수 있는 그 친구한테 실망한 나만 조용히 입술을 깨물었다.
그 친구 잠이 많은 건 일찌감치 알려진 사실이다. 고3때 중요한 면접이 있었는데, 시간이 돼도 안 와서 취업담당 선생님이 그 친구 자취방까지 찾아간 적도 있다. 물론 그 때도 친구는 자고 있었다.
친구들끼리 야유회 가기로 한 날도 일찍 나온 나는 한참을 쭈그리고 앉아 기다렸고, 다 모이고도 이 친구만 오지 않아 차를 몰고 직접 모시러 간 적도 있다.
예쁘면 다 용서된다는 말이 있는데, 이 친구한테 적용되는 말이다. 특히 남자들은 이 친구한테 부당하리만치 관대했다. 그런 점들이 매사에 더 짜증을 몰고 왔다.
내가 지금 심한 건가?
나도 뭔가 이 친구한테 서운하게 한 건 없을까?...... (없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이 친구한테는 난 당하기만 했다.
혹시 다른 친구들도 이 친구만큼 실수하는데 유독 이 친구한테만 화가 더 나는 건가?
학교다닐 때는 성적이나 여러 면에서 경쟁자였다. 내가 질투에 눈이 멀어 친구를 너그럽게 봐주지 못 하는 건가?..... (아니다!)
난 친구가 많지는 않지만 한 명 한 명 다 진심으로 대한다. 마음에 뭔가 거짓을 가지고 아닌 척 연기하느니 차라리 안 본다.
이런 내 불편한 마음을 이 친구한테 고백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아무렇지 않은 척 대하기도 힘들다. 감정의 결벽증 탓이다. 세월따라 이런 완고함도 좀 느슨해지면 좋으려만, 난 스스로를 외로운 언덕으로 몰아가고 있다.
어쨌건 그 한 줄에 걸맞게 나도 답을 보냈다. 다섯 줄!
그 다섯 줄 쓰면서 지운 게 더 많다.
안 좋았던 기억을 지우는 약이라도 있다면 마시고 싶은 심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