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상을 정리하는데, 노트 안에서 웬 종이 묶음이 툭 튀어나온다.
법륜스님이 쓴 주례사다. A4용지로 다섯 장 정도 된다. 근데 시처럼 짤막짤막한데다 내용 또한 쉬운 말로 되어 있어 단숨에 읽힌다.
언제던가, 남편한테 화가 나서 하루종일 침묵했던 때가 있었다. 그 날 화장실에 앉아 있는데, 작은 놈이 문을 빼꼼 열더니 웬 종이를 한 장 들이밀었다.
마침 읽을 거리가 궁했던 지라 얼른 받아 읽었는데, 바로 이 주례사였다.
남편이 프린터하는 중이었는데, 아들이 한 장 한장 나올 때마다 나한테 갖다주었다. 남편이 시킨 건지, 아들이 자발적으로 한 일인지는 모르지만 어쨌건 마음을 쏙 빼앗기며 읽었다.
그 때도 글이 좋아 몇 번을 읽고 또 읽었는데, 지금 다시 봐도 여전히 좋다.
내용만 요약할 수도 있지만, 글의 느낌을 그대로 전하고자 한두 부분만 옮겨 본다.
[....저 사람 돈은 얼마나 있나, 학벌은 어떻나, 성질은 어떻나, 건강은 어떻나, 지위는 어떻나, 이렇게 다 따져 가지고 이리저리 고르는 이유는 덕 좀 볼까 하는 마음입니다.....아내는 30%주고 70% 덕보자고 하고, 남편도 자기가 한 30% 주고 70% 덕보려고 하니, 둘이 같이 살면서 70%를 받으려고 하는데, 실제로는 30%밖에 못 받으니까 살다보면 결혼을 괜히 했나, 속았나 하는 생각을 십중팔구는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덕보려는 마음이 없으면 어떨까? 좀 적으면 어떨까요? 아이고, 내가 저 분을 좀 도와 줘야지, 저 분 건강이 안 좋으니까 내가 평생 보살펴 줘야겠다. 저 분 경제가 어려우니 내가 뒷바라지 해줘야겠다. 아이고, 저 분 성격이 괄괄하니까 내가 껴안아서 편안하게 해줘야겠다. 이렇게 베풀어줘야겠다는 마음으로 결혼을 하면, 길 가는 사람 아무하고 결혼해도 별 문제가 없습니다.....]
당연한 말인데 실제 우리가 결혼하면서 과연 이런 마음가짐으로 했을까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또 스님은 임신을 상당히 비중있게 다룬다. 임신할 때 부부의 마음가짐, 뱃속에 있을 때 그 엄마의 태도, 주변 사람의 관심, 이런 것이 아이의 대부분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태어나서 3년까지만 자식을 향해 온 정성을 쏟고 그 다음은 부부 위주로 살라고 말한다.
[......애 때문에 남편 떼어놓고 애 데리고 서울로 이사가는 사람, 애 데리고 미국 가는 사람이 있는데 이것은 절대 안 됩니다. 두 부부는 애기 세 살 때까지만 애를 우선적으로 하고 그 이후에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남편은 아내, 아내는 남편을 우선으로 해야 합니다.
애기는 늘 이차적으로 생각하십시요. 대학에 떨어지든지 뭘 하든지 신경쓰지 마십시오.
누가 제일 중요하냐? 아내요 남편이 첫째입니다.
남편이 다른 곳으로 전근가면 무조건 따라 가십시오. 돈도 필요 없습니다. 학교 몇 번 옮겨도 됩니다. 이렇게 남편은 아내를, 아내는 남편을 중심으로 놓고 세상을 살면 아이들은 전학을 열 번 가도 아무 문제없이 잘 삽니다. 그런데 애를 중심으로 놓고 오냐오냐 하면서 자꾸 부부가 헤어지고 갈라지면 애는 아무리 잘해줘도 망칩니다....]
일단 애 위주로 살지 말라는 말은 내 생각과 일치해서 듣기가 좋다.
애들보다 부모를 우선 순위로 두는 것도 좋다. 그런데 나보다 남편을 더 우선하라는 말에서 좀 거북해진다. 지금껏 그렇게 살지 않은 탓이다.
남편은 그 날, 이 글을 복사해서 주며 말했다. [잘 읽고 찬찬히 생각 좀 해 봐.]
난 그동안 얼마나 오만했던가.....
내가 남편을 이렇게 사랑하는데, 그럼 된 거 아냐? 그런 건방진 마음 뿐이었다.
연애할 때도 내가 더 열성이었고, 결혼해서도 내가 더 유난을 떠는 쪽이다. 근데 그게 다다. 내가 남편을 사랑하는 크기만큼, 남편이 나한테 잘해주지 않는 것만 섭섭했지 정작 내가 남편한테 어떻게 할 것인지, 남편이 가장 바라는게 무엇일지, 그런 생각은 안 해봤다.
스님 말씀처럼 오직 덕 보자는 심보만 키운 탓이다. 사랑한다는 이유로.
이제부터 마음보를 뜯어고치기로 한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것만 생각하기로 한다.
사실 일을 그만 두고 집에 있게 되면서 부쩍 그런 심정이 된다.
내가 직장다닐 때는 이런 마음이 별로 안 들었던 걸 보면, 사람이란 처지에 따라 참 치사스럽게 변하는구나 싶기도 하다. 하루하루 날이 뜨거워질수록 바깥에서 일하고 들어오는 남편이 안스럽고, 살짝 미안하다.
간사하거나 말거나 온몸이 까맣게 타서 골아 떨어진 남편 얼굴을 보다보면 이런 생각 밖엔 안 든다.
잘해 줘야지, 잘해 줘야지, 잘해 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