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혼 초, 남편과 나는 항상 새벽 산책을 즐겼다.
만화 그리는 남편과 나는 어차피 야행성이었다. 임신을 하고 두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도 그 습관은 오래도록 계속됐다. 무더운 여름밤, 새벽 2시, 3시 무렵이면 우리는 가볍게 집을 나섰다.
동네를 조금만 벗어나면 밤이 낮보다 더 휘황찬란한 시내가 있었는데, 기분이 좋을 때는 거기까지 다녀왔다. 입덧할 때는 먹고 싶은 음식을 찾으러 돌아다니기도 했다.
그렇게 동네를 한 바퀴 돌고 마지막엔 항상 집 근처 놀이터에서 쉬었다. 벤치에 앉아 가만히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시원한 밤바람이 모기와 더위로부터 오는 짜증을 식혀주었다.
남편은 원래 나만큼 산책을 좋아한 사람은 아닌데 억지로 그런 습관을 들였다. 출산을 순조로이 하려면 운동을 꾸준히 해야한다는 걸 강조했기 때문이다.
어두운 동네를 돌다 보면 버리려고 내놓은 물건이 많았는데, 그 중 쓸만 한 걸 제법 건질 수 있었다. 가장 큰 건수는 장농이었고, 자잘한 걸로는 바구니, 압축봉, 욕실 선반, 뻐꾸기 시계 등등 여러 가지가 있었다. 남편은 흠있는 걸 손 봐 주었고, 난 욕실 바닥에 퍼질러 앉아서 줏어온 물건의 묵은 때를 열심히 벗겨냈다. 반짝반짝 깨끗해진 물건을 보면 기분이 절로 흐뭇했다.
우리는 30대 초반의 늦은 결혼이면서도 모아놓은 돈이 없었다. 반지하 전세를 겨우 얻었다. 살림을 장만할 여력은 아예 없었기에 각자 자취하면서 쓰던 물건들을 모두 합쳐 신혼집을 꾸몄다. 그 집에서 집들이도 하고 첫 아이 돌도 치루었지만, 난 부끄럽다는 생각을 한번도 안 했다. 사랑하는 남편과 함께 산다는 사실만이 자랑스러웠다.
사촌 시누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이 수군대는 걸 모르지는 않았으나 무시했다.
처음엔 그렇게 버티다가 꼭 필요한 가전제품은 재활용센터에서 샀다. 애들 천 기저귀까지 얻어다 썼다. 당시 남편의 수입으로는 아끼고 또 아끼는 외에 대안이 없었다.
시간이 흘러 다세대 2층으로 옮겼다. 그 동안에 웬만한 가전제품은 다 새 걸로 갈았다. 재활용을 열렬히 지지하는 나였으나, 새 물건을 하나하나 사는 기분도 꽤 괜찮았다. 그 새벽 산책길에서 쓸만한 물건을 만났을 때의 기쁨과는 또 다른 뿌듯함이랄까 성취감이 있었다. 새 것이든 헌 것이든 우리한테 필요해서, 남편과 내가 함께 선택해서, 우리집에 들여왔다는 점에서 이 물건들은 다 소중하다.
지금은 남편이 전업을 해서 새벽 산책의 즐거움은 사라졌지만, 아이들을 유모차에 태우고 돌아 다녔던 그 밤나들이의 추억은 아직도 선명하다. 그 때 사 들인 중고 가전 중에 지금까지 남아있는 게 바로 냉장고다.
우리집을 다녀간 누군가가 남편이 총각 때 쓰던 소형 냉장고를 보고 콧구멍만 하다고 했고, 그 말이 우리 귀에 들어와 마음이 불편하던 차에, 살림을 하려면 최소한의 용량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 사 들였던 냉장고다. 다른 중고 물건들과 달리 지금껏 수리 한 번 안 하고 잘 썼다.
근데 요즘들어 소음이 부쩍 심해졌다. 한 번 의심이 생기니 김치도 유난히 빨리 익는 듯 하였다. 수명이 다 됐다는 냉장고의 그런 신호가 은근히 반가왔다.
남편과 나는 기다렸다는 듯 인터넷을 뒤지고 동네 대리점을 둘러 보았다.
냉장고는 우리 부부의 가난한 신혼을 증명하는 마지막 훈장같은 거였다. 서로 말은 안 하고 있었지만, 내심 그 훈장을 얼른 떼버리고 싶었던 것이다.
찢어지게 가난했던 신혼을 후회하는 건 아니지만, 몇 년 살면서 객관적인 눈으로 보니, 주변 사람들 입장에선 우리가 참 한심해 보였겠다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접시가 빨리 깨져 예쁜 다른 접시를 사고 싶은 심정으로 우리는 냉장고를 지켜보고 있었던 거다.
드디어 어제, 냉장고를 사려고 집을 나섰다.
하지만 서너 군데 돌아보고 망설임을 거듭하다가 결국 애들 색연필만 사서 돌아왔다.
깔끔하고 폼나는 냉장고가 어찌나 많은지, 일단 그 다양함에 눈이 어지러워 딱히 이거다 하고 집어낼 수가 없었다. 6년 전, 남편과 내가 시장 다녀 오는 길에 동네 중고가게를 지나다가 우연히 눈에 들어온 지금의 냉장고를 보고 동시에 탐을 냈던 것과 같은, 느낌이 팍 오는 냉장고가 없었다.
남편은 하루라도 빨리 내게 새 냉장고를 사주고 싶은 마음인 것 같은데, 내가 선뜻 마음이 가지 않았다. 다음에 마지막으로 한번 더 나와보기로 하고 집으로 오는 버스를 탔다.
가만히 버스 창 밖을 내다보던 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집에 가서 냉장고 청소나 깨끗이 해야겠어. 쓰는 데까지 써보지 뭐...]
남편은 말없이 듣고만 있었다. 고개를 약간 끄덕인 듯도 했다.
물론 지금 당장 사서, 주방을 새단장하고 싶은 욕심을 완전히 버린 건 아니다.
하지만 남편과 나는 이미 안다. 필요한 물건을 구하러 돌아 다니고, 고민하고, 그렇게 공을 들여 새 식구를 맞이하는 기쁨이 얼마나 큰지를....
우리 신혼을 빛내준 냉장고를 성급하게 내쫓지 않으면서, 언젠가 갖게 될 새 냉장고를 꿈꾸는 것만으로도 지금 충분히 마음 설레고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