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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아버지, 내 아버지!


BY 산골아이 2005-05-18

1994년 봄, 아버지는 이십 여 년만에 처음으로 쇠창살로 가로막히지 않은 세상 속으로 걸어 나오셨다. 아버지는 밝은 햇살에 헐거워진 몸을 가누지 못하고 기우뚱 기우뚱 발걸음을 옮기셨는데 가끔 고개를 돌려 당신이 살던 곳을 응시 할 때는 눈빛이 흔들리기도 했다.
병원 시설은 좋았지만 아직도 내 가슴에서 지워 버릴 수 없는 건 굳게 이중으로 잠겨있던 쇠창살, 병실복도마다 쇠창살로 외부세계와 차단된 곳에서 푸른색 환자복을 입고 서성이던 사람들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때 내가 왜 계단을 따라 위로 위로 올라갔을까? 한곳이라도 막히지 않는 곳이 있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희망 같은 걸 갖고 있었던 건 아니었나 싶다.
손으로 만져본 쇠창살의 그 차가웠던 촉감에 소름이 돋아나 아버지가 그곳에 갇힐 거라는 생각에 끝내 울고 말았던 기억을 내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아버지가 정신분열증이라는 무서운 병에 걸려 젊은 시절을 모두 보내버렸던 요양원과 병원은 늘 이렇게 침울하고 아픈 기억으로 다가온다.
1994년 봄은 아버지가 회갑을 맞으신 해였다. 우리 가족은 아버지 회갑잔치를 두고 많은 의견을 내놓았고 아버지를 퇴원시켜 회갑잔치를 치르자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그 당시 병세는 많이 호전되어 있었지만 안심 할만큼 완쾌된 건 아니었기에 불안한 마음도 없지 않았지만 그보다는 연세가 많으신 아버지가 너무 불쌍했으므로 우리 가족은 모든 것을 감수하기로 했다.
아버지는 처음으로 서울 나들이를 했다. 독자에 종손인 남동생이 맞춰준 양복이 어색해서 몇 번이나 옷을 만지작거렸지만 키가 크고 몸이 호리호리한 아버지는 양복이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아버지를 보기 위해 많은 친지들이 왔었고 자식인 우리들은 아버지의 손을 잡고 케이크를 자르며 노래를 부르다가 목이 메었다.
아버지는 멍한 눈을 하고서 큰소리로 박자도 음정도 맞지 않는 노래를 얼굴이 발개지도록 불렀다. 사회생활을 해보지 못한 아버지는 어린아이와 다름이 없었고 어떤 사람들은 이상한 눈빛으로 아버지를 힐끔거리기도 했다. 그날 밤 끝내 어머니는 참았던 눈물을 쏟아내었고 회갑연에 왔었던 사람들도 하나둘 눈시울을 적셨다. 남동생은 아버지를 업고 꺼이꺼이 우는데 아버지는 동생 등위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아버지, 우리아버지는 그런 사람이었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즈음부터 아버지는 속으로 병을 앓고 있었는데 그때에는 어머니조차도 그런 사실을 알지 못했다. 당시 서울에서 국밥 집을 했던 어머니는 아버지가 가끔 이상한 행동을 할 때에 그 모든 것이 술 때문인 것으로 알았다고 한다. 그러나 정도가 심해지자 어머니는 국밥 집을 정리하고 귀향을 했다.
그러나 그때만 해도 가끔 발작을 했을 뿐 뚜렷한 증상이 없었기에 동네 사람들이 아버지께 이장 일을 맡겼고 아버지는 이장을 하면서 가지고 있던 돈을 모조리 써버리고 말았다. 내가 초등학교 삼 학년이 되었을 즈음 아버지는 완연한 정신분열증 증세를 나타내고 있었다. 우리 가족의 고난이 시작된 것이다. 아버지가 병이 든 원인은 사고 때문이었다.
한때 심한 보릿고개를 겪게 되었는데 돈을 벌겠다고 아버지는 원양어선을 타러간 것이다. 그러나 불과 이년만에 바다에 빠져 머리를 다치게 되고 만다. 아버지는 머리가 좋고 필체가 좋기로 동네에서는 유명한 분이셨다. 그때만 해도 무척 멋쟁이이셨고 늘 볼펜과 메모지를 가지고 다니면서 좋은 글을 적곤 했던 취미도 있었다.
그러나 하루가 다르게 변해 가는 아버지의 모습은 이미 정상인이 아니었고 증세가 발발하면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소리를 지르며 온 동네를 휘젓고 다녔다. 우리가족은 시도 때도 없이 집에서 도망을 가야했고 어머니는 숫제 집에서 살수조차 없었다. 어느 날은 한밤중에 입은 옷 그대로 무작정 뛰쳐나와 보리밭에 누워 숨어있기도 했고 어느 날은 폐가에서 추운 겨울밤을 웅크리고 보내기도 했다.
난 그때부터 마음속으로 아버지를 원망하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일부러 병이 든 건 아니지만 너무나 힘이 들었기에, 어머니의 몸은 시퍼런 멍 자국이 가실 날이 없었기에, 나는 아버지가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먹을 것도 없어서 밀가루 배급으로 배를 채웠고, 돈이 없어서 학교에도 간신히 다니며 아버지 때문에 매일 불안에 떨어야 했던 끔찍한 날들이었다.
내가 중학교 일 학년 때 아버지는 결국 외삼촌에 의해서 요양원으로 들어가시게 되었다. 아버지는 병이 중증이었던 관계로 강제로 끌려가다시피 요양원에 수감되고 말았다. 그 뒤로 우린 아버지를 보기 위해 일년에 몇 번씩 요양원으로 면회를 갔다. 아버지를 보러 가는 날이면 아버지가 계시던 요양원 건물마저 우중충해서 견딜 수가 없었고 아버지는 우리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눈이 휑하니 쑥 들어가 있었다.
아버지는 요양원에서 구타를 많이 당했고 독한 약을 드신 탓에 눈빛이 항상 멍했다. 아버지와 헤어질 시간이면 손을 들고 우리를 애타게 바라보시던 아버지 때문에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마음속으로 미친 듯 불러댔던 아버지!
그렇게 한해 두 해 아버지는 요양원에서 봄을 맞았고, 겨울을 맞았고, 생신을 맞았다. 외부세계와 차단된 쇠창살 안에서 죽음 같은 삶을 사셨지만 쉽게 낫지 않는 병이었기에 아버지는 그렇게 젊은 시절을 온통 그곳에서 보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남동생이 시설이 좋은 정신병원에 입원을 시켰고 그곳에서 몇 해 지낸 후 아버지는 제대로 치료를 받고 환갑이 있던 해에 퇴원을 하신 것이다.
머리가 좋으셨던 아버지는 병원에서 영어공부를 했다고 한다. 평소에도 쓰고 읽는걸 좋아하셨던 분이라 종이와 펜만 있으면 늘 글을 썼는데 한문과 영어로 빽빽한 메모장을 보여주기도 했다. 내가 워낙 어려서부터 병이 드셨던 탓에 정신이 맑으셨던 때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내게는 별로 없다. 그렇지만 셋째 딸이었던 날 유난히 예뻐하셨다고 한다.
얼마 전에 아버지가 보내오신 택배에는 아직도 변함없는 아버지의 필체로 내 주소가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아버지는 병원에서 퇴원한 뒤로 차츰 병세가 호전되어 이제는 정상인과 다름없이 생활하고 계신다. 벌써 내년이 고희가 되시는 아버지는 치아관리를 못해서 치아가 나쁠 뿐 아직도 건강하시다. 얼마 되진 않지만 어머니랑 같이 농사일을 하시고 가끔 바닷가에 사는 큰언니 집에 가서 뱃일을 도와주기도 하신다.
한때는 아버지를 원망하며 내 인생이 제대로 풀리지 않을 때마다 아버지 탓이라 생각했던 마음도 없지 않았다. 가끔 아버지와 통화를 할 때면 용건 외에는 말을 하지 않고 엄마를 찾곤 했던 내 습성을 작년에 깨닫게 되었는데 어머니의 고통만을 보아왔던 내가 미처 느끼지 못했던 아버지에 대한 감정이었다.
아직도 아버지는 가끔 아이처럼 어머니에게 모든 걸 의지하곤 한다. 어머니는 겉으로는 아버지에 대한 원망을 풀어놓지만 아버지의 건강을 염려하는 마음이 절절히 묻어있다. 내 삶이 바빠서 그 동안 부모님께 효도다운 효도한번 해보지 못했다. 작년에는 어머니칠순을 맞아서 열 다섯이나 되는 가족이 부모님을 모시고 제주도 여행을 다녀왔는데 기뻐하시던 두 분의 모습을 생각하면 마음이 따뜻해진다.
부모에게 효도를 하는 건, 돈을 많이 버는 것도 아니요, 유명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며, 부모님을 웃을 수 있게 해 드리는 게 진정한 효도라는 말이 생각난다.
아버지는 병마와 싸우며, 어머니는 아버지 병 수발과 자식들을 혼자 키우느라 가난과 외로움을 견디며 청춘을 다 보내버리시고 고희가 되신 두분, 내 아버지는 다른 집 아버지들처럼 우리들에게 그늘이 되어주지 못하고 어깨를 내리누르는 무거운 고뇌였다. 학교 다닐 때도, 직장생활을 할 때도 자랑할게 없는 아버지였기에 누구에게도 아버지에 대해서 말을 하지 못했다. 창피하다는 생각이 가슴속에 자리하고 있었던 시절이었다.
내 나이 마흔 하나, 아버지를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부녀간에 나눌 정을 병으로 인해 저당 잡혀 버린 세월, 지난 세월을 돌려 받을 수는 없지만 이제 남은 세월만큼은 그 무엇에도 빼앗기고 싶지 않다. 아버지가 보내준 택배에 또박또박 쓰인 글씨가 내 글씨랑 똑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