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이 되어 가는 나는 아직 우리집이 없습니다.
아이들이 커서 벌써 제키를 훌쩍 넘어버렸는데 아직 내
집이 없습니다. 섬살이 처음 시작할때 부모님께 얹혀 살
고,학교관사에 6년을 살면서 집걱정은 없겠다 싶었죠.
그래서 아주 마음 푹 놓고 얼마간의 돈이 모아지면 언덕위에 그림같은 흙집 짓고 아름다이 아름다이 살리라 했
습니다.
주말이면 시댁으로 가서 구절초 밭에 가고 마당 한켠에
걸린 솥에 구절초 넣어 푹 삶은 물로 애들 방보다 큰 욕
실에 큰딸, 작은딸과 셋이서 깔깔깔 웃어대며 목욕하고
시아버지 싫은소리 귓둥으로 들어 넘기며 집에 대한 아
쉬움 모른척 살았는데, 시골와서 집걱정 안하는 걸로 만
족한다 했는데, 시골와서 우리 막내 건강해 진걸로 충분
하다 했는데, 나 좋아하는 산으로 들로 다니며 하고 싶은
일 할 수 있어 괜찮다 했는데 이제부터 슬슬 집걱정을 해
야겠습니다.
서러움으로 말문이 막혀 버린 그날을 생각하면 나 사는
꼴이 왜 이렇게 폭폭한가 눈알이 빠질듯이 아파옵니다.
사는게 왜 이렇게 폭폭하답니까. 사는게 왜 이리 깝깝하
답니까. 창고로도 쓸수 없는 빈 집 손보고 청소해서 살았
는데 우리 교장 납득할수 없는 이유들로 외압을 넣습니
다. 이제는 내려앉은 천정이며 수리비용이 만만찮을 옆방을 고쳐서 풍물교실을 만들어 꾕과리를 쳐대겠답니다.
쾌지나칭칭 징을 치고 어와둥둥 북을 치겠답니다.
비정규직은 학교장이 맘대로 해고해도 된다고 하더니,
그래서 작년말에 급식실 종사자들을 해고하라더니, 남아
서 버릴지언정 우리가 관사에 사는걸 두고 보지 않으려
합니다. 빈관사 줄줄이 두고 연구학교 영화강사 계약기
간 만료 한달 남겨두고 계약직 영양사 애기하나 데리고
사는 방한칸에 합방시킬때부터 남의 일 같지 않았습니
다. 그나마도 나는 참 오래도 봐준다 했습니다.
나는 또 무슨 괘씸죄에 걸렸을까요. 하긴 3월부터 재계약
을 하면서 입을 싹 딱아버렸거든요. 쌀이라도 한됫빡 퍼
다 떡을 해서 먹일걸 그랬나 봅니다. 양식장에서 전복 몇
마리 건져다 죽을 쒀 한대접 줄걸 그랬나 봅니다.
돼지고기 두어근 떠다 집된장 넣고 푹 삶아 동배추 곁들
여 먹일걸 그랬습니다. 먹탐 심한 노인넨줄 뻔히 알면서
나는 또 왜 이리 아둔했답니까.
싫었습니다.
내 할일 빈틈없이, 내 할 도리 입댈데 없이, 하면 되려니
그렇게만 하고 살면 내 흉은 없다는 생각으로 살았습니
다. 먹이는것도 전략이라는 게 우스워 그런짓 않고도 건
재하다는거 보이고 싶었던 객기가 나를 아프게 합니다.
지역에서도 내 놓아버린 그런 사람과 밥을 한끼 먹더니
그를 아주 괜찮은 사람으로 분류했을때, 지역의 온갖 사
건을 들쑤시고서 해결사로 나서 이권을 챙기는 그를 지
역유지라 의형제 맺었다 했을때, 나도 내 잇속 챙겨 밥
한그릇 먹일껄 그랬다 후회가 되는건 무슨 까닭입니까.
마음 같아서는 양식장에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광어를
내다 팔아서라도 이사가자 하고 싶습니다.
전복양식 늘리지 말고 집구해서 이사하자 하고 싶습니다
참아야 합니다.
인격형성이 제대로 안된 사람을 상대로 쌈질해서 손해보
는 어리석은 짓으로 우리 가족의 행복을 늦출수는 없으
니까요.
손바닥으로 가슴 한번 쓸어내리고, 열손가락으로 머리카
락 한번 쓸어 올리고, 입술이 삐쭉거리지만 웃음 한번 흘
리고, 눈을 감고 그림을 그립니다.
우리집. 구절초 말리는 꽃방, 베개만드는 공방(?), 산야초
차 익을 장독들, 백목련 한그루, 자목련 한구루, 매화꽃,
진달래, 산국, 해국, 가득 심은 마당, 갯돌로 만든 지압길
그렸습니다.
그림을 그리고 나니 마음이 많이 풀렸습니다.
눈도 아프지 않습니다.
그가 원망스럽지도, 밉지도 않습니다.
징을 치고 북을 두드리고 꾕과리를 치면 나는 우리방에
서 상쇠를 돌리리라.
아줌마로 거듭나고, 엄마로 굳건해지는 그날까지 나는
열심히 열심히 상쇠를 돌리렵니다.
오월님따라 먼산보고 하하웃고 잡초인생 살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