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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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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와 오지랖 넓은 나


BY 예운 2005-03-21

 

그녀는 힘이 참 샜다.

바가지 하나 엎어 놓은것처럼 보이는 배가 아직은 임산부로 보이지 않았겠지만 돌바기 조카를 업고 있는 내가 검불처럼 맥없이 뒤로 밀리며 으악스런 그녀를 처음 만났다.

조그만 식당을 하던 우리집. 내가 임신을 하고 몸이 무거워 지면서 동서네 돌바기 아이는 내가 보고 동서가 식당일을하는 나름대로 좋아보이는 우리집이 시끄러워지기시작한 날이기도 한 그날. 말로만 듣던 애들엄마가 쳐들어(?) 온 것이다.

남편은 무서워 뒷문으로 도망(?)을 갔고, 동서도 만나면 복잡하다며 옆집에 숨었고, 나는 돌박이 조카를 업고 그녀와 맞섰다. 어이 없는 광경 앞에 태연하기로 작정을 했지만 방에서 잠을 자고 있는 다섯살짜리 딸을 들쳐 안으며 자기 딸이니 데려가겠다는 그녀를 감당 할 수 없어 2층 당구장에 있던 남편 친구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친구들이 아이를 안고 가자 그녀가 술냄새 풍기며 내뱉기 시작하는 말들이 나를 향해 날아오기 시작했다. 전처라는 당당한 위세에 눌려 부른 배를 감추고만 싶은 초라한 내모습.

큰집으로 전화를 했다. 아이를 주라신다. 어차피 데려가 키울 여자가 아니니 주라고 하신다.

시숙님의 말씀이 든든한 응원가라도 되듯 나는 친구들을 불러 아이를 내어 주고 말았다.

목이 터져라 우는 아이를 데리고 그녀가 가고 돌바기 아이의 무게에 눌렸는지 내 풀에 꺾였는지 다다미 방에 풀석 주저 앉았어도 눈물은 나오지 않고 그냥 담담했다.

이사오기전에 살던 이웃집 엄마가 전화했다. “언니 어쩐다요. 애기 엄마라는 사람이 와서 온 동네에 난리를 치고 갔는데, 시간이 늦으면 안갈 것 같아 우리집에서 맥주 한잔 주며 시간을 끌었는데 막무가냅디다. 그 애기 엄마가 언니 아니었어? 어쩜 그렇게 감쪽같이 속였대. 우리가 얼마나 놀랬게. 말하는걸로 봐서는 금방 쳐들어가겠던데...” “응 고마워 벌써 왔다 갔어 애 데리고..” 우리가 사는데를 알아내려고 그녀가 했을 말들에 자존심이 상했다.

이게 뭐야. 혼자서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그녀에게서 전화가 왔다. 가게 근처 여관인데 아이가 울어서 달랠길이 없으니 데리러 오란다. 세상에 자기가 낳은 아이를 달랠수가 없으니 날더러 데려가라니 이런 어이없는 여자가 있나 그녀가 일러준데로 찾아간 나는 자지러지게 우는 아이를 안고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나와 버렸다. 내게는 어쩌지 않는 그녀였지만 남편한테 하는 것 보면 정말 무서운 여자였으므로 지레 겁을 먹어 버렸는지, 아님 울음 그친 아이를 다시 뺏을지도 모른다는 불안 때문이었는지, 아이를 데리고 집에 온 나는 그제서야 엉엉 소리내어 울어 버렸다.

수족관에서 흐르는 물소리에 묻힌 내 울음소리와 아이의 고르지 못한 숨소리는 그렇게 새벽을 향하고 있었다.

그날이후 그녀는 수시로 전화를 해서 남편에게 소리를 질러댔고, 아무말 못하는 그는 늘 화가 나 있었다. 무슨 잘못을 얼마나 했길래 말한마디 제대로 못하냐는 내게 또 화를 냈다.

남편은 식당이 끝나기도 전에 없어져 버렸고, 나와 식당일을 끝낸 동서가 돌아가고 날마다 그시간이 되면 문밖을 힐끔거리는 버릇이 생겼다. 맨정신으로는 찾아올 여자는 아니었다. 맨정신으로는 전화 할 여자도 아니었다. 그렇게 얼마간을 불안함으로 지내는데 낮에 정말로 술을 한방울도 안 마신 맨 목소리로 전화를 했다.

아이와 하룻밤만 자게 해주면 다시는 안 찾겠다는 그녀에게 나는 술마시지 않는다는 다짐을 받고 아이를 데리고 약속장소로 가기로 했다. 밤마실을 가자는 내게 아이는 내게 약속을 받아내고 있었다. “엄마 혹시 지난번에 그 아줌마 만나면 나 아니라고 해 다른 애라고 해 알았지?” 가슴이 아팠다. 어른들이 저지른 잘못에 상처 받는 아이들. 괜히 잘 걷고 있는 아이를 들쳐업고 그녀에게로 갔다. 포장마차에 앉은 우리 셋. 아이는 내 가슴에 얼굴을 묻고 매미처럼 붙어 떨어질줄을 모르고, 그런 아이를 보며 눈물을 훔치는 그녀를 보며 복잡다양한 마음이 된 나는 그때부터 그녀가 안쓰럽기 시작해 지금까지 쭉 질투같은 마음은 안생긴다.

그렇게 아이를 달려서 보내고 마땅찮아하는 남편과는 상관없이 나는 또 다음날 아이를 데리러 그녀가 사는 곳으로 갔다. 호프집에 달린 방에서 주인여자와 주인여자의 아이 그리고 그녀와 그녀가 데리고 사는 큰아이 이렇게 넷이 산다고 했다.

“지지리 궁상. 당신이나 나나 참 불쌍하다. 못살겠다고 애들까지 나눴으면 하나라도 잘 살던가 아이고 내 청춘아 어떻게 발등을 찍어도 이렇게 오지게도 찍었네”

아이에게 옷 한 벌 사입히고 쇼핑백을 하나 들려서 데리고 내게로 오던 그녀.

“엄마 지난번에 그 아줌마가 옷 사줬어. 그런데 다음부터 나 여기 보내지 마 알았지?”하던 아이가 있어 되려 내가 본처가 된 기분이었던거, 그런 그 아이를 두고 갈수 없어 영 눌러 앉고 말았다고 말하는 나. 나와 안성맞춤이던 그 아이가 지금 나보다 훨씬 키가 큰 중학교 1학년이 되어 때로는 내게 눈을 치떠며 대들기도 한다.

대드는 그 애를 보면서 많이 컸다 지금 니가 나한테 뎀빈다고? 게겨보겠다고? 더러는 속이 상하기도 하지만 보기만 해도 오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날들 기억은 없어 보인다. 식당 테이블에 앉혀 놓고 한글을 가르키며 쥐어 박았던건 기억하면서 다른 기억은 없는 아이.

지금도 그녀는 우리가 사는걸 시시콜콜 다 알고 있는 눈치다. 큰아이 생일날, 어린이날 크리스마스때 종종 술취한 목소리로 전화를 하곤 하더니 요즘은 뜸하다.

술마시지 말라는 내말이, 나중에 아이들이 커서 지 엄마 찾았을때도 그렇게 살거냐는 내말이, 그때 아이들이 찾아 가면 잘 살고 있어야 되지 않겠냐는 내말이 약이 되었을까 새벽녘이면 전화벨 울리던 것이 뜸하다. 오지랖 넓은 내 행동이 약이 되었으면....

나는 지금도 오리랖 넓게 그녀가 어떻게 사는지 걱정을 한다.

내가 아이를 낳으면서부터는 애들이 얼마나 보고 싶을까도 싶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