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중충한 날씨다. 그러나 내 맘은 오늘 그리 우중충하질 않다. 마음 기상표가 있어 매일 매일의 마음 날씨를 기록한다면 꽤 볼 만할 것 같다. 죽 끓듯 변하는 내 마음의 변덕이 희한한 기상표를 그려내리라.
사실 겉으로 보면 그리 변덕인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나는 나를 알고 있다. 물론 모르는 나도 있을 테지만 적어도 내 맘이 어떤 상태인지, 흐린지 맑은지 그 정도는 간파할 수 있을 만큼은 알고 있다. 나를 안다는 것, 그것은 꽤 잔인한 일이기도 하다. 나 자신이 부끄러울 때가 많기 때문이다.
얼마나 작은 일에도 열을 내는지, 또 정말 사소한 일인데도 우쭐거리며 덩실덩실 춤출 것처럼 좋아하는지...
그래서 스스로 유치해 보일 때가 많고 속물로 느껴져 진저리 치기도 하는 것이다.
어떤 날.
갑자기 세상이 허무하게 느껴지고 우울하고 만사가 시큰둥한 날이 있다.
그런 날은 모든 일이 시시해 보인다. 다 의미가 없게 느껴진다. 내가 평소 즐겁게 생각하고 의미를 두던 일조차 불현듯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인가 부질없이 보인다.
그러면 갑자기 나는 싸늘해진다.
세상에 대해 냉소적이 되면서 세상으로부터 멀어지고 싶어진다.
혼자 그러고 말면 그래도 괜찮을 텐데 만만한 사람에게 불똥이 튄다.
예전엔 그 상대가 주로 아이들이었다. 물론 지금도 그럴 상대는 아이들 밖에 없어 보인다. 그러나 오히려 아이들이 더 어려운 존재임을 온 몸으로 온 마음으로 절실히 깨달았기에 이젠 많이 자제하고 그저 스스로를 억누르며 견딜 뿐이다. (그래, 사는 건 견디는 일이다.)
세상에 만만한 사람이 없어지면 가장 만만한 사람은 자신이 된다. 내가 나를 만만히 여기면 자꾸 쉽게 나를 자학하려 한다. 그리고 자신을 부정하고 못 견디어 한다.
그 때문일까, 요즘 나 자신을 보면서 미운 구석이 참 많다는 것을 느낀다.
그나마 바보 같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긍정적인 칭찬이었던 착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었는데 그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자꾸 발견하고 있는 요즘이다. 절...대...로... 나는 그렇지 않다.
마음에 가시가 있고 날 선 칼이 있다.
내가 착하게 보일 수 있었던 비결은 나보다 강한 사람이 내 주위에 쫙 깔린 까닭일 뿐...
그래서 내 속상함, 내 짜증이 표현되지 못할 뿐이다.
만약 순하디 순한 사람만 내 곁에 있다면 나는 마구 퍼부었을 것 같다.
이 얼마나 비겁쟁이란 말인가!
돌아보면 친정 여동생이 늘 희생양이었다.
그 아이는 나보다 사실 더 순한 아이였다.
그러나 아무도 그렇게 생각지를 않았다. 다 나를 착하다 하고 여동생은 나보다 드세다 생각했다. 물론 힘은 그 아이가 더 세긴 했었다. 동생은 말주변이 별로 없는 편이었고 영악하질 못한 어수룩한 아이다.
밖에서 속상한 일을 갖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동생이 틈을 보이면 나는 그 아이에게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 그러고 나면 속이 후련했다. 내 독설을 들은 동생은 참질 못하고 화를 표출했고 그러면 항상 동생이 어른들께 혼이 났었다. 그러나 여동생은 언제나 언니인 나를 진심으로 좋아하고 끈끈한 애정으로 마음을 함께 해준다. 가끔 옛날 일을 들먹이면서 자기의 억울함을 토로하기도 하지만...
어머님은 토를 다는 며느리가 제일 싫다 하신다.
그런 말씀을 내게 자주 하시는 것은 내가 자꾸 말꼬리를 문다고 생각하시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나는 하루종일 어머님 곁에 있으며 정말 너무나 시시콜콜한 일에까지 지적들을 듣다가 진짜 억울한 마음이 생길 때 숨통 트듯 변명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도 어머님께는 분명히 말꼬리 물고 토 다는 며느리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나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변명한다.
뭐라고 한 말씀드리면 속으로 어머님 미운 마음 생기는 대신 죄송한 맘이 들어서 차라리 더 나은 것이라고...
정말 어머님께 작은 말대답이라도 하고 나면 내 맘은 편치를 않다. 그러면 꼭 죄송하다고 사죄 말씀드리게 된다.
그러나 무조건 예예 하면 어머님을 속으로 미워하며 맘이 곪을 것 같다.
그런데 곰곰 생각해보니 어쩜 이것도 참으로 기막힌 자기 합리화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진실로 착한 사람, 바른 사람은 나와는 다르게 살 것 같다. 주변에 정말 시부모님께 진심으로 잘 하는 며느리들도 많던데...
모시고 산다는 하나 만으로 온갖 칭찬은 독차지하고 있는데...
속내는 그렇지 못해서 어떡하지?
어머님은 맨날 내 칭찬하시는 친지 분들의 전화를 받으며 얼마나 속이 타실까?
그런데 난 자신이 없다.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님을 자꾸 깨닫기 때문이다.
못된 속. 겉으로 드러내질 못할 뿐 부글부글 끓어오른 내 짜증들.
겉으론 너무도 평온한 일상들 속에서 나는 곪아간다.
아무도 모른다. 남편도, 어머님도 내가 이 정도일 줄은 정말 모른다.
아이들에겐 어쩌다보니 들켜버린 것 같다.
엄마를 날씨로 표현하란 질문지에 소나기라 적은 것을 보면...
그 이유로 엄마는 기분이 좋았다 나빴다 변덕스럽기 때문이라는 구체적인 답까지 해 놓은 것을 보면...
옛날 동생에게 다 들켰던 것처럼 그렇게 아이들에게도 들킨 것이다.
그런 이유로 좀 더 구체적으로 내가 싫어지는 날.
그 날이 정말 내겐 우울한 날이고 우중충하고 견디기 힘든 날이다.
마치 오늘 날씨처럼...
하지만 다행히 지금 이 순간의 내 마음은 그렇질 않다.
정말 그런 날은 한 줄 글로 마음을 표현하는 것조차 허용되질 않는다.
아니, 오히려 그렇게 마음을 드러낸 지난 글들까지 무작정 다 지워버리고 싶어지는 것을...
횡설수설 무슨 술 주정도 아니고 지금 뭐 하는 걸까? 그러면서도 이렇게 쏟아내며 잠시라도 후련해지는 것을 보면 나는 오늘 아무래도 매 맞을 일이 있는가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