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다닐 때 단짝이던 친구가 말했다.
"난 너랑 이야기 하는 것이 좋아. 내가 무슨 말을 하건 너에게는 새로운 이야기거든..."
그저 그 친구가 들려주는 이야기 빼고는 우리 반 아이들 사이에 일어나는 일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없었다.
이모는 고등학생이던 나를 한심하다는 듯이 바라보며 말했다.
"너, 참으로 세상 잘 만났다!...명색이 일류여고 교복을 입고 다니니 망정이지...ㅉㅉㅉ... 옛날처럼 학교가 없던 시절이면 사람들이 널보고 다들 모자란다고 했을 것이다. 너 처럼 순진한 사람은 세상에 없을 것이다... 어찌 그리 아무 것도 모르고 살 수가 있냐?..."
대학교 다닐 때 친구는 새로 산 옷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어찌 생각할 것인지 염려가 많았다.
이해할 수 없었던 내가 이렇게 말했다.
"네가 좋아서 산 옷인데 왜 그리 남의 생각이 중요하니? 네 옷은 네 맘에 들면 되는 것 아니니?..."
내 말에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이 어찌 그럴 수가 있니? 너도 주변에 관심 좀 갖고 살아라..."
다른 친구를 따라 친구의 고모집에 다녀온 후 그 친구가 말했다.
"우리 고모가 너 중매하고 싶다고 하더라..."
"너네 고모가 내가 어떤 사람인 줄 알고 중매한다고 한다니? 그저 너 따라가서 잠시 얼굴만 비친 것인데..."
"요즘 너 같은 처녀가 어디 있냐고 하더라..."
"왜?..."
"네가 입고 간 원피스 색깔이 그렇게 많이 바랬는데도 그냥 입고 다닌다고..."
"그래? 내 옷이 그렇게 많이 바랬나?..."
집에 와서 옷을 벗어 살펴보고 나도 웃었다.
언니가 입던 옷을 물려 받은 것인데 빨간 바탕에 노란 다이아몬드 무늬가 촘촘한 그 옷은 겨드랑이 부분만 그 색깔이고 등이며 팔 부분은 연한 핑크 바탕에 흰색 다이아몬드 무늬로 바뀌어 있었던 것이다.
친구의 말을 듣기 전까지 그 옷이 색깔이 바랜 줄도 모르고 입고 다닌 나 자신이 웃으워 쿡쿡 웃었다.
결혼하고 나니 남편은 잠이 잘 오지 않는다고 하였다.
혼자 자다가 옆에 다른 사람이 있으니 자꾸 신경이 쓰이고 잠이 깬다고...
옆에서 돌아 눕기만 해도 잠이 깨는 남편은 날더러 부스럭 댄다고 신경질을 내곤 하였다.
그래서 난 화장실에 가고 싶어도 꾹 참거나, 더 이상 참을 수 없으면 남편이 눈치채지 못하게 하려고 온 몸의 신경을 다 곤두세워 조심조심 이불 속에서 빠져 나와야 했다.
그래도 들켜서 남편의 잠을 깨우기 일쑤였지만...
잠을 얌전히 잔다고 이모의 칭찬까지 받았던 나는 이렇게 남편의 구박덩어리가 되었다.
신혼 초, 결혼하지 않은 친구들이 있던 남편은 그 친구들과 어울려 술 마시고 밤을 새우고 새벽에 들어올 때도 있었다.
남편이 외박을 해도 난 잠을 잘 잤고, 바가지를 긁을 줄도 몰랐다.
잠자느라 남편이 늦는 줄도 몰랐고, 늦게 오는 남편으로 인해 맘 졸이지도 않았으니 바가지 긁을 일이 없었던 것이다.
다만 깊은 잠에 빠져, 새벽에 들어오는 남편 문도 못 열어주고 담을 넘게 만든 것이 좀 미안했을 뿐...
남편은 잘 아프다.
감기 몸살 두통 복통을 달고 산다.
그것도 부족해 이리 말한다.
"어찌 이상하다. 몸살이 오려나... 감기 걸리려나..."
아니, 몸살이면 몸살이고, 감기면 감기지, 어찌 몸살이 오고 감기에 걸릴 것을 미리 알고 걱정한단 말인가...
도무지 나로선 이해하기 힘든 사람이다.
같이 사는 사람이 아프다고 하면 좋아할 사람이 있을까...
나는 그런 남편이 싫어서 엄살한다고 비난하였다.
이런 나를 남편은 인정머리 없는 여자라고 하였다.
남편과 달리 난 건강한 편이다.
감기 몸살 두통 복통 이런 것 잘 모르고 산다.
어디가나 잘 먹고, 잘 자고, 마음이 편하니 몸이 아플리가 없다.
그런 내가 조금만 아프다고 하면 남편은 내가 미안할 만큼 신경을 쓴다.
누워 쉬라고 하고 이불도 덮어주고 자기가 나서 먹을 것도 준비한다.
큰언니는 아버지에 대해 가끔 불평을 하곤 하였다.
내 생각에는 정말 좋은 아버지인데... 그런 언니가 못마땅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늙은 아버지 수발을 드는 언니를 보고 부끄러웠다.
나는 죽었다 깨나도 언니처럼 아버지를 돌보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내 장점이라고 생각하던 것들이 바로 나의 단점이 되어 무심하고 남을 배려할 줄 몰랐던 것이다.
언니의 단점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바로 언니의 장점임도 알았다.
언니의 예민함이 내가 느끼지 못하는 불만을 느낄 수 있고, 내가 미처 생각치도 못하는 부분에서 아버지에 대한 배려로 나타남을...
남편을 불평이 많고 좀스럽다고 은근히 무시하고, 자신은 대범한 사람인양 착각하고 살던 자신에 대해서도 하하... 웃는다.
무심한 나랑 사느라고 남편이 얼마나 맘고생이 심했을까도 생각한다.
나는 물론 죽었다 깨나도 그 정도를 짐작도 못하겠지만...ㅎㅎㅎ
남편의 엄살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엄살이 아니고 예민함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남편에겐 내가 느끼지 못하는 고통들이 느껴졌을 테니까...
그 만큼 남편이 날 배려하며 사는 것이라고 미루어 짐작도 한다.
둔한 나는 그것을 배려라고 느끼지 못하고 귀찮게 군다고 신경질을 낼지도 모르지만...
이렇게 이해심없고 인정머리 없는 여자랑 사는 남편에게 미안하다.
그래도 순간순간 부딪치면 또 화가 머리 꼭지까지 오르겠지만...
남편 덕분에 편안하게 사는 부분은 금시 잊고 남편의 예민함을 또 불평하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