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다란 기압이다. 숨이 가빠진다. 공포는 무지에서 온다. 알 수 없는 존재,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가 커다란 힘으로 누른다. 무엇이지? 도대체 왜 이렇게 떨리는 걸까...? 그는 빛 한 줄기 없는 무중력의 늪속에서 고압의 공포를 느낀다. 알 수가 없다. 일에 대한 부담이라면 이보다 더한 공포도 거뜬히 이겨냈었다. 일에 대한 것은 아니다. 무엇일까... 왜 이렇게 숨막히고 심장이 벌렁거리며 귀가 터져라 쿵쾅거리는 것일까... 무슨 일이 있었지? 그렇지, 연지. 그녀를 만나고있지. 그녀가 뭐라했더라? 아...결혼...아이...아이가 생겼다고 했지...
순간, 그의 뇌리에 박히는 단어가 있었다. 그의 가슴을 짓누르던 공포가 점차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버지...'' 내가 '아빠'가 돼야한다. 그의 가슴은 다시 어둠을 가르는 뱃고동처럼 붕붕 공허한 방망이질을 빠르게 이어가고 있었다. "내가 아빠가 돼야한다구? 아..안돼!!!"
"나가! 너처럼 제멋대로이고 대책 안서는 새끼는 내 생전 첨이다. 어쩜 그렇게도 막돼먹은거니? 당장 나가!" 아홈살박이 사내아이를 닥치는대로 후려치던 빗자루를 집어던지며 그녀는 달아오른 화를 식히지 못한채 징그런 쥐새끼를 내몰듯 사내아이를 대문밖으로 몰아냈다. '쾅!'부서져라 닫히는 대문은 오히려 절대 부서지지 않는 철옹성의 철문처럼 삐걱소리 한번으로 잠겨버렸다. 사내아이는 온 몸이 욱신거리는 아픔을 더는 느낄 수가 없었다. 닫혀진 대문에서 여운음처럼 출렁이는 '왕~'소리가 마취제처럼 사내아이의 감각세포들을 마비시켜버렸기 때문이었다. 얼마를 그렇게 멍하게 서 있었을까...대문 안에서 왁자한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에 마비되었던 감각세포들이 깨어나면서 사내아이는 반사적으로 대문끝쪽 담쪽으로 몸을 숨겼다. 징그럽게 익숙한 목소리들이 왕왕거린다. 사내아이는 소리의 형체들을 확인하고 싶어졌다. 아홉살 아이가 올라가기엔 높은 담이다. 더구나 담장 위에는 철조망도 덮여있다. 멈칫 담장을 바라보던 사내아이는 왕왕거리는 소리들이 커지는 것을 느끼자 어떤 망설임도 없이 담장에 삐죽이 나온 돌부리를 잡고 돌틈을 더듬어 발을 딛고 담장위까지 목을 삐죽이 올려본다. 도독의 침범을 막기위한 담장 위 철조망은 사내아이가 가족이 되기를 막는 그녀의 눈빛처럼 가시를 번뜩이고 있었다. 몇 번을 밑으로 미끌어져 떨어지고 나서야 사내아이는 겨우 담장안의 세계를 엿볼 수 있을만큼의 높이로 자신의 고개를 빼낼 수 있었다. 옆집 담장과 맞닿은 2세티미터가 될까말까한 틈에 끼워넣은 엄지발가락은 시퍼렇게 멍들어있었고 가시를 피해 철줄을 잡은 양쪽 검지는 가시의 번뜩이는 날카로운 빛에 긁혀 벌겋게 핏줄을 세우고 있었다. 그렇지만, 사내아이를 가장 아프게 한 것은 담장안의 세상이었다. 아버지와 새어머니가 이복 동생들의 옷매무새를 고쳐주며 저녁메뉴에 대한 의견을 왁자하게 떠들고있는 그 풍경은 발가락을 조이는 돌담보다 엉덩이를 후려차던 차가운 땅바닥보다 뻘겋게 살갛이 벗겨진 틈을 아리게 쓸어가는 바람보다 몇 십배의 아픔으로 사내아이의 가슴에 돌덩이를 던지고 있었다.
"난 그래도 자장면이 젤로 좋아" 투덜이 큰 동생이 고집을 피운다. "아빠~나 탕슉" 막내 여동생의 혀?은 소리에 아버지는 사내아이한테는 한번도 보여준 적이 없는 환한 웃음으로 "그래~~~ 우리 공주님 좋아하는 탕수육 먹자. 자장면도 먹고!" "와~~~!!!!" 사내아이가 쥐새끼처럼 내몰렸던 대문을 열면서 그 가족의 어느 누구도 사내아이에 대해 말을 꺼내거나 주변을 두리번거리지 않는다.
'나도 자장면 먹고싶어여' 이대로 내려와 슬쩍 막내의 손을 잡고 조용히 저들의 틈에 끼어서 생각만해도 심장이 벌렁거리는 자장면을 먹으러 가고 싶다. 지금이라도 잘못했다고 싹싹빌면 저 틈에 끼일 수 있을까... 가족들의 모습이 물속 풍경처럼 흔들거린다. 너무 멀리 가버리면 어쩌나싶어 흐르르는 눈물을 닦으려 손을 든 순간, 사내아이는 옴 몸의 균형을 잃고 그대로 땅바닥으로 떨어져버렸다. '넌, 반성하면서 집에나 있어!' 그녀의 쇠뭉치같은 목소리가 웅웅 사내아이의 가슴에 울리고있었다. 그래, 어차피 난 끼지 못해. 깊은 절망감으로 목소리까지 숨어들어간 사내아이는 '악' 한마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철철 흐르는 눈물만 훔쳐낸다. '나도 먹고싶다구요...아버지....' 뜨거운 눈물을 쏟아내느라 흐흐흐학~ 헐떡이는 숨결사이에 겨우 몇 마디를 뱉어내던 사내아이의 가슴 속에서 '아버지'는 점점 지워져갔다. 그 남자는 저들의 아버지요, 그녀의 남편이다. 내 아버지가 아니다. 난 아버지도 없다. 난 아버지를 모른다. 피보다 붉은 눈물을 철철 흘리던 사내아이의 눈은 어느 새 싸늘한 얼음처럼 식어갔고 절조망의 가시보다 더 날카롭게 번뜩이고 있었다. 너무도 낯설고 너무도 아득한 저들 속에 자신은 절대 발가락 하나도 끼워넣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이 사내아이의 눈빛을 공포가 아닌 분노와 냉소로 번뜩이게 할 뿐이었다.
'절대 할 수 없어. 난 가족이 뭔지도 몰라. 난 아버지란 존재가 뭘 하는 사람인지, 그런 존재가 있는 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내가 ....' 그는 불안한 빛이 역력한 그녀의 시선을 바라볼 수가 없다. '음...' 신음소리만 겨우 내던 남자를 더는 참고 기다려줄 수가 없었는지, 여자가 입을 연다. "알았어요. 지금 당신은 그 동안 우리가 함께 만들어가던 모든 것을 지우겠다며 'Delete'키를 눌렀어요. 당신이 고개를 한 번만 더 끄덕이면, 그 순간에 모든 게 끝나요. 아무것도 남지 않고 사라지죠. 마지막 메세지가 떴어요. -장말로 지우시겠습니까?-"
남자는 자신의 고개가 그렇게 무겁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머리속에는 '안돼' 할 수 없어'란 메세지가 분명하게 떠 있었지만, 가슴 속에서는 무엇인가 다른 어떤 메세지가 차마 끓어 올라오지 못한 채 남자의 고개를 붙잡고 있었다. "정말로 이 아이를 지우고 나도 지울 꺼에요?" 차라리 그냥 일어나고 싶은 마음을 겨우 짓누르고 여자가 다시 묻는다.
천천히 남자의 고개가 딱 한 번 더 아래로 떨어졌다가는 반쯤 다시 올라온다. "알았어요! 모든 문서가 다 지워졌습니다. 한 번 지워진 문서는 다시는 복구되지 않습니다!" 짧고 차갑게 여자가 대답하고 일어선다. 다시 아래로 푹 떨어진 남자의 고개는 식은 커피잔만 덩그런히 남은 테이블위에 똑똑똑 눈물을떨구었다. 남자는 검지를 들어 그 눈물을 찍어서 테이블 위에 무언가를 끄적였다. 처음으로 그 남자를 뜨겁게 했던 그녀, 20년을 잊고 있었던 웃음이란 걸 남자에게 찾게 해 준 여자, 그 남자의 가슴에 태양처럼 따스한 빛을 갖게 했던 그녀가 떠난 테이블위엔 두번째 글자가 써지기 전에 첫번째 글자가 말라가며 남자의 목덜미를 붙잡았던 가슴 속 그 말이 새겨지고 있었다.
나 도 아 빠 가 돼 고 싶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