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아직도 그녀의 향기를 기억하고 있다.
그녀의 사진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사랑이 가득하다.
그 사랑은 미련이 되기도 하고, 갈망이 되기도 하고, 안타까움 이었다가 원망이 되기도 한다.
그녀의 손을 떠올려 본다.
그녀의 손길은 늘 부드럽고 자극적이었다.
그녀는 힘이 빠져나간 깃털같은 손을 그의 손등에서 손가락 사이로 미끄럼타듯 만지곤 했었는데...
그 부드럽고 촉촉했던 감촉이 그대로 그의 손등에서 가슴으로 찌릿 ~ 되살아난다.
'보고싶다...'
하얀 피부와 가느다란 손가락, 늘 붉게 젖어있던 입술...
아직도 이토록 생생히 그녀를 기억하고 있다니...
그는 다시 절망과 그리움으로 담배를 씹는다.
이제는 그녀를 마음껏 그리워하기로 한 것을 스스로 잘 한 일이라고 위로하며 찌그러진 필터를 돌려 물으며 담배에 불을 붙힌다.
그는 그녀를 떠나기로 한 날부터 지금까지 그녀와의 모든 추억을 냉동시켜버렸다.
지우기에는 너무 짙었고 태워버리기에는 너무 많았던 추억들.
지우고 정리하고 하는 그 어떤 일들을 하지 않았다.
그냥 멈춘 시간처럼 어느 순간부터 그녀에 대한 모든 것을 가슴 한 구석 아주 외지고 깊은 곳에 커다란 얼음상자를 들이고 그 속에 무조건 넣어버렸다.
그런데, 며칠 전, 거리에서 우연히 차를 몰고가는 그녀를 본 것이다.
핏기 없는 얼굴에 아무런 표정없이 정면의 창밖으로 시선을 걸어놓고 그 남자의 앞을 천천히 미끄러져 지나쳐버린 그녀를 본 순간, 그의 얼음상자가 한 순간에 녹아내렸다.
1초도 되지 않을 것 같은 짧은 순간에 그녀에 대한 일체의 기억과 추억과 감정이 고스란히 시간을 거슬러 되살아나버린 것이다.
그는 녹아버린 그녀의 얼음방 대신 자신의 다리를 얼어붙게 해 버린 그녀의 출현으로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멀어져가는 그녀의 차를 따라 시선도 고정되어 있었다. 온 몸을 뒤흔드는 자신의 심장소리와 스쳐간 그녀의 옆모습만이 그에게 살아있을 뿐, 해야 할 일도 만나야 할 사람도 바뀌는 신호등도 그를 애써 비켜가는 사람들이나 울려대는 핸드폰 소리도 죽어버렸다.
그는 그 날 다시 살아움직이게 된 핸드폰으로 걸려 온 첫번째 사람과 무조건 술이나 한 잔 하자고 떼를 써서 머리 속이 텅 비어버리고 노란 위액을 다 토해내도록 술을 마셨다.
아무리 마셔도 그녀의 옆모습이 지워지질 않았고 한 번 녹아버린 추억의 얼음창고는 다시 문을 열어 주지 않았다.
사정없이 쏟아져내린 그녀와의 추억에 깔리고 얻어맞으며 그는 술잔을 비우고 속을 비우고 머리를 비워냈다.
그는 그렇게 모든 것 다 비우고 나서야 비틀거리며 겨우 전철에 올라섰다.
늦은 시간이라서인지 몇 안되는 사람들이 나름대로의 방행으로 고개를 떨구고 졸고있었다.
자리 하나를 차지하고 앉아 창에 머리를 기대자 그도 몽롱히 잠으로 빠져들었다.
이제 몇 분 뒤면 그녀가 있는 집으로 들어갈 수 있을꺼야
오늘은 정말 힘든 날이었어.
빨리 그녀가 있는 집으로 가고싶다.
빨리 그녀의 웃는 얼굴을 보며 따스한 그녀의 가슴에 머리를 묻고 안아달라고 해야지.
방이다. 그녀의 환한 미소가 그의 뺨을 만지고 있다.
그녀의 허리를 둘러 안으며 속삭인다. " 사랑해" 그녀의 가슴에 머리를 묻는다.
쿵!
그의 머리가 서있는 사람들의 중심을 잡아주기 위해 세워진 전철의 쇠파이프에 제동 없이 부딪힌 것이다.
그의 손에 만져졌던 그녀는 오간 데 없고 번쩍 뜬 그 남자의 눈에는 자신을 힐끔거리는 낯선 사람들이 보였다.
서울이다. 그녀와 있었던 호주가 아니라 내가 혼자있는 서울이다.
그녀와 지냈던 방이 아니라 온통 낯선 사람들로 가득한 전철안이다.
순간, 그의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무엇인가가 울컷 치밀어 올라왔다.
그의 눈에서는 하염없이 뜨거운 물줄기가 흘러내리고 그의 가슴에서부터 밀려 올라온 그 뜨거움이 급기야는 그의 입술을 열고 튀어나왔다.
"윤정아!" "흐흑흑......윤정아!" "윤정아!"
그녀와 헤어진 뒤 처음으로 그는 눈물을 흘렸고,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이제는 아무리 불러도 대답없는 그 이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