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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의 발자국


BY 개망초꽃 2004-10-27

하루에도 많은 손님이 오고 간다.
식물은 사람의 발자국 소리에 커가듯이
매장이 문을 안 닫고 돌아가는 것은 순전히 손님 발자국 소리 때문일 것이다.

멀리서 손님이 오는 모습만 봐도 저 손님이 어떤 물건을 주로 사는지
성격이 까다로운지 마음이 따스한 분이지 금방 알 수 있다.
사람 모습이 다 다르듯 성격도 생긴 모습처럼 제각각이고,
사과중에서도 신맛이 도는 후지를 좋아하는지 달콤한 맛이 강한 홍로를 좋아하는지도 알고
빵도 통밀빵을 사러 오는건지 카스테라를 사러오는 지도 알고 있으며
고기도 돼지고기만 먹는지 소고기만 사러오는지 또한 목살을 주로 사는 분인지
안심만을 선호하는지도 알고 있다.
처음부터 손님들의 성격이나 입맛을 알고 있었던 건 당연히 아니였다.
처음엔 인사도 속으로 삼키며 했었으니까.
여러번 오신 손님 얼굴조차 제대로 기억하지 못해서
“그래 가지고 어떻게 장사를 하세요.”
퉁명스럽게 내 던지는 이런 말들을 여러번 들어야했다.

3개월이 지나면서 손님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다.
피부가 까무칙칙한지 맑디맑은지 머리모양이 꼬불거리는지 물결 같은 웨이브인지도 보였고,
사과 한 알 한 알 낚시하듯 건지는지 보이는 대로 가벼이 집는지도 알게 되었다.

6개월이 되어가니까 성격이 보이기 시작했다.
인상을 쓰고 매장엘 들어와서는 계산할 때 신경질을 낼까봐 겁을 먹을 수 밖에 없는
얼굴표정으로 물건 값을 지불하고 인사도 안받고 가시는 손님을 대할 때는 내가 뭘 잘못했나 손님이 떠난 거리를 한참씩 보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건 그 사람의 성격이었다고 6개월 쯤 되니까
그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알게 되었다.
6개월이 지나니까 과일 하나라도 더 집어주고 싶은 따스한 마음씨의 손님들을 알게 된 건
내가 장사를 하면서 얻은 보이지 않는 재산이 되어 있다.

일년이 되었을 때 그동안 매장을 찾아주신 발걸음에 감사의 표시로 선물을 드렸다.
들꽃 이름을 붙였었다.
달개비꽃 상, 별꽃 상, 붓꽃 상, 강아지풀 상...
손님들의 발걸음 소리를 듣고 매장은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꽃잎이 흩어지면서 열매를 얻게 되었다.

장사를 하려고 마음 먹을 때쯤이 이 맘 때쯤이었다.
은행잎이 노랗게 여물어 자신이 살아 온 땅바닥으로 다시 돌아 갈 때쯤,
시린 손 끝을 잠바 주머니에 넣고 벚나무 잎이 떨어져 선명하게 낙인이 찍힐 주차장 길을 걸을 때쯤,
아파트 뜰에 몽글몽글 꽃몽오리를 달고 있을 9월에 친정으로 이사를 들어오고선
한달이 훌쩍 지나 뭔가를 해야 할 부담을 안고 장사할 자리를 보러 들락거리면
국화는 활짝 열린 얼굴로 나를 보았다고 느낄 무렵을 지나
국화는 누리칙칙하게 늙어 버리고 있을 때쯤에...
그래 장사를 해야겠구나 다시 마음을 잡아 묶어 버렸다.

한번도 걸어 보지 않은 길로 걸어가야겠구나.
혼자서 감당해야 할 생활고로 짓눌러진 어깨를 억지로라도 펴야겠구나.
한쪽이 붕괴된 가정을 약한 몸으로 이끌어 가려면
한끼도 굶지 말고 억지로라도 먹어야겠구나.
작은 집이라도 마련해서 아이들과 같이 살 때까지 옷도 사 입지 말고 지독해져야겠구나.

평소 때 보지도 못한 물건을 펼쳐 놓고 이 길이 내 길인가 겁을 먹어 가슴이 달칵 거렸다.
광고할 돈이 없어 몇 달동안은 시린 겨울바람과 마짝마른 나뭇잎만이 매장문을 열고 들어 왔었다.
어깨가 시려 억지로 펴고 있던 두 어깨가 저절로 움추러 들었다.
12월달에 장사를 시작하고 전기료를 아끼기 위해 난로를 약하게 켜 놓아서 하루종일 매장안은
밖의 기온과 별반 다를게 없었다.
원래 위가 약한 난 위가 아파서 밥 맛을 잃었고 위장약을 때마다 먹어야 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정해진 그 시간에 매장문을 열었고
약속한 시간이 되어야만 매장문을 닫고 시리고 지친 몸을 버스에 실어 날랐다.
봄이 오던 날, 매장앞에 오백원짜리 작은 꽃 화분을 사다가 놓았다.
나무 밑둥엔 겨울동안 잠을 자던 풀씨들이 깨어나
처음 본 나에게 두 손을 활짝 펴서 아는척을 했다.
붙임성이 좋은 풀들은 빈틈없이 모여모여 한바닥을 다 채우고도 남아 돌아
시멘트 틈사이에도 보도블럭 모서리에도 모여헤쳐 자세로 나를 빤히 올려다 보곤 했었다.

봄이 오면서 풀씨가 움트면서 손님 발자국 소리가 분주해 지기 시작했다.
장사를 한지 일년이 넘으면서 장사할 때 진 빚을 다 갚을 수 있었다.
조금 더 모으면 집을 장만하고 조금 더 벌어 50살쯤 되면 마당이 있는
시골집을 살 생각에 가슴이 빵빵하고 탱탱하게 불어 있었다.

쑥부쟁이를 중심으로 코스모스도 심고 박넝쿨도 올리고 울타리엔 칡도 얽히게 해야지..
개망초꽃도 심을까? 좁은 뜰을 망치지는 않게 솎으며 키워야지...
물봉선화도 고마리도 며느리밑씻개도 꿀풀도 냉이도 꽃다지도 씀바귀도 메밀꽃도...욕심도 많네...
목화도 감자도 고구마도 고추도 상추도...강아지풀도 뽑지 말아야지...
이질풀꽃도 예쁜데...패랭이꽃도 물론...

그러나 올 해 들어 뜨거운 기운이 돌던 여름부터 손님의 발자국 소리는 표시나게 줄어들고 있었다.
동네에 있는 가게들은 문을 닫고 간판불을 켤 수 없는 빈 상점들이 늘어가기 시작했다.
전쟁이후 최고의 불황이라고 했다. 아이엠에프보다 더 힘들다고 했다.
손님들도 물건을 사면서 비싸다는 말이 덧붙여지고, 세상이 어찌 되려고 이러는지 한숨 소리를 냈다.
빚만 없으면 살지요. 건강만 잃지 않으면 살겠지요.
위로의 말을 서로 주고 받으며 여름을 보내 버렸다.

손님의 수는 삼분지 일이상 줄고 매출은 반이상 줄었다.
급기야 나는 건물 주인에게 전화를 걸 수 밖에 없었다.
월세를 좀 깍아 달라고 했다. 주인은 안된다고 하면서 이십만원을 내려주겠다고 했다.
가게를 내 놓겠다고 했더니 마음대로 하라고 한다.
계약서는 내년 12월이니까 내가 알아서 내 놓고 가게가 안나가도
내년까지는 장사가 되든 안되는 월세는 내야만 한다.

손님 발자국 소리가 이렇게 정겹고 경쾌하고 신명나는 일인 줄 요즘 더 실감한다.

월세를 못 낼 정도는 아니지만 돈을 모으지 못하고 있다.
시골에 작은 뜰이 있는 집을 사는 것이 당분간 지연이 될 듯 하다.
비오는 날 유리창에 기대어 들꽃이 핀 마당을 보며 게으른 하루를 살고 싶었는데,
맑은 날은 마당에 나가 들꽃과 마주보며 느슨하게 서성대고 싶었는데,
벗과 자식들과 추억에 젖어 모닥불 피워 밤늦도록 수다를 떨고 싶었는데,
글을 쓰고 글을 읽으며 밤이 새도록 칭얼거리고 싶었는데...
이 일들이 조금 늦어질 것 같다.

손님의 발자국 소리가 이리도 그리웁고 보고싶고 듣기좋은지
요즘, 요즘같이 나뭇잎이 설렁설렁 지는 날 더 실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