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곤색 양복을 꺼내 입고,
유행이 지나도 한참 지난
총각 시절에 매었던 넥타이를 하고 나서는
그를 불러 세웠다.
"아무래도 넥타이 안 하는 게 나을것 같은데"
하니 돌아서던 그는 넥타이를 끌러 내게 건넨다.
헐 낫다, 그래도 아까보다 좀 봐줄 만 하다.
같이 가자고 어차피 시내 갈 거면 같이 가자고
몇 번이나 되풀이 하는 그를 먼저 보냈다.
나중에는
" 나랑 함께 나가는 거 챙피해서 그러나?" 하고 덧붙이는 그에게
" 그랜저로 모셔 갈 능력 될 때 같이 다니자구" 하였다.
그는 내 남편이다. 키 179, 운동으로 다져진 근육이 멋있었던 남자다.
향긋한 비누향내를 늘 날리고 다녔던 그 남자는
당당해서 언제 어디서나 남자다운 멋이 풍겨나서 아름다웠던 남자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그 남자의 향기가 아름다움이 사라지고 있었다.
마당에서 가을 햇빛이 한소큼 내려비치는 시월의 마당에서
그 남자는 눈이 부신듯 나를 올려다 보며 묻고 있었다.
나랑 다니는 게 챙피하냐고?
그 남자의 얼굴빛이 검다.
유난히 빨리 자라는 머리카락은 이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한참이나 된 듯 길어보여 단정한 느낌이 들지 않는다.
광대뼈가 유난한 남편의 얼굴을 처음 보신 외할머님은 내게 말했다.
"여자든 남자든 광대뼈가 나오면 안좋다 던디."
광대뼈가 유난한 그는 청바지에 잠바가 잘 어울렸고,
또 큰 키 덕인지 정장차림도 근사했었다.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은 염색으로 애써 가렸지만
틈틈이 자라는 흰 머리칼을 다 가릴 수는 없기에
그를 초췌하게 만드는데 한 몫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그런 모습으로 나를 쳐다보는 그가 왜 어색해 보일까?
내가 알았던 남자의 모습이 아니라 딴 사람의 실루엣을 보고 있는 듯
나는 흠칠 놀라고 있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 남자 옆에서 세월을 쌓아가면서
더 많이 더 깊이 낯이 익어가야 하는데
내 안에서 한 발자국 물러서고 있는 여자를 보았다.
함께 한 세월이 깊은 강을 이루었을 텐데
그 남자는 살아오면서 내내 내게서 떠나가고 있었던 걸까.
아니 우리는 서로를 향해 하나 하나 씩 돌을 쌓고 있었던 걸까.
철대문을 열고 집을 나서는 그남자의 뒷모습에서
난 그래도 우리가 함께 산 그 긴 세월의 흔적을 찾기라도 할려는 듯
성큼 성큼 골목길을 빠져나가는 그를
뒤에서 한참이나 지켜 보고 있었다.
갑자기 허기가 졌다. 아침을 먹고 돌아선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왜 와락 배가 고파지는 걸까.
남비에 물을 넣고 가스레인지를 돌렸다.
치치칙 불이 붙고 물이 끓을 시간을 참지 못해
나는 주섬주섬 뒤져 단감 하나를 들고 게걸스럽게 먹기 시작했다.
그래도 배가 고팠다. 참을 수 없는 허기가 나를 괴롭혔다.
밖은 놀이터에는 가을 바람이 한가롭고
앞집 이층 난간위에는 노랗게 그리고 보라빛으로
소국이 향기를 내뿜으며 넘치듯 피어있는데
왜 이렇게 견딜 수 없는 허기는 사람을 스산하게 만드는 걸까.
시간이 흐르면 세상도 따라 변화하는게 이치다.
그 세상 속에는 나도 있고 그도 있다.
우리들의 변화를 받아들여야 하는데
나는 지금의 그를 도저히 내 안에 받아들일 수 없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산도 강도 제 멋으로 피었다 질 것이고,
조금씩 살을 내리고 조금씩 살을 찌워 갈 것이다.
계절이 바뀌듯 그렇게 모든 것들은 변화하겠지.
봄에는 봄꽃이, 여름에는 여름꽃이 피고, 가을에는 가을 꽃이
그리고 겨울에는 시린 겨울 꽃이 또 그렇게 제각기 피워나겠지.
그 꽃들의 다양한 빛과 향기를
얼만큼 더 나이가 들어야 느낄 수 있을 것인지.
나는 아직 채 허물을 벗지 못한 파충류처럼
군더더기의 옷을 입고
그래서 한 참을 더 슬퍼해야 하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