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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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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혼].나에게도 신혼이 있었던가.......


BY 그린미 2004-10-12

 

신혼이라는 단어를 떠 올리면 가장 먼저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오는 그림은

달콤하고 짜릿하고 아름답고 즐겁고...........

 

그러나 나의 기억속에 인두질 당한 흔적이라곤 고생스럽고 힘들고 두번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은 어쩌면 모자이크 처리된 과거로 돌리고 싶은것들 뿐이다.

 

우선,

유교사상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바늘꽂을 틈조차도 내주지 않는 지독한 시집의 가풍에

난 결혼도 하기 전부터 질리고 있었다.

 

남편은 친절하게도 결혼도 하기전에 일찌감치 시집 분위기 파악에 조금이라도 보탤 요량으로

쨤쨤이 귀뜸해준 게 나에게는 공포로 다가왔다.

 

방두칸짜리 전셋집에서 시작된 나의 신혼은 한마디로 경악 그 자체였다.

군입대를 앞둔 시동생이 옆방을 차지하고 있었고, 수시로 들락거리는 시부모님과

시댁 대소가 어른들 대접에 임신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난 내몸을 추스릴 엄두도 못냈다.

 

입덧을 유난스러이 해대는 며느리가 대견하다고 생각하셨는지 과일이랑 고기를 사가지고 오시면 아예 하루종일 내방에 진을 치고 계시는 시댁 어른들 틈에서 난 맘대로 다리한번 편하게 뻗지를 못했다.

 

어느날 너무 피곤해서 문도 잠그지 않은채 늘어지게 낮잠을 자고 일어나니까........

세상에.....

어른들이 내 주변에 죽 둘러 앉아서 뭔 얘긴가를 큰소리로 주고받고 계셨는데

난 단잠에 취해서 아뭇 소리도 듣지 못한 가운데 별 꼴볼견을 다 보여준것 같아서

지금 생각해도 민망하고 얼굴이 달아 올랐다.

 

첫아이를 낳고 새로 집을 사서 시부모님과 시조모님을 모시고 살게 되었다.

층층시하의 그 고충 아마 겪어본 사람은 그 맛을 다 알거다.

 

유난히도 까탈스러운 시조모님은 언제나 따로 밥상을 봐 드려야 했고,

잔병치레로 하루도 웃는얼굴 보여 주시지 않는 병약한 시어머님.....

뚝뚝하고 말씀이 없으신 시아버님.....

 

아침에 츨근한 남편은 놀기좋아하는 총각시절의 그 끼를 버리지 못하고 거의 밤늦게 귀가하는

바람에 마주 앉아서 오손도손 깨 쏟아질 가능성은 일지감치 포기해야 했다.

 

하루에 밥상을 아홉번이나 차려야 했고,어른들이 계시는 집이니까 집안 대소사가 생기면 으레히 우리집을 그냥 지나치질 않는 시댁 손님들....

다과상과 술상 보는건 일도 아니었고 연세드신 안 어른들은 오시면 며칠씩 묵어가시기 일쑤였다.

 

손끝에서 물 마를날 없었지만 난 그래도 남편에게 불평 한마디 쏟을 주변머리도 없었다.

이게 운명이고 내 할일이다라는 생각으로 버틴것 같았다.

아니 더큰 이유는 내가 잘못하면 친정 부모님 욕 먹일것 같아서  속으로 울음 삼키며 겉으론 언제나 잘 웃는 며느리 역활에 충실했다. 

 

난 숨이 막힐것 같은 시집살이에 그래도 시댁 어른들 사랑만큼은 어느 누구못지 않게 받고 산게 그나마도 나를 지탱하게 한 힘이 되었다.

 

잊지못할 에피소드는 시조모님방과 우리부부가 거처하는 방 사이에 조그마한 쪽문이 달려 있었는데 어느날 컴컴한 새벽에 눈을 뜨니까 머리맡에 시조모님이 앉아 계셔서 기겁을 했다.

 

난 처음엔 귀신인줄 알았다.

명암이 뚜렷하지 않은 이른새벽에 우리부부가 아닌 다른 사람 그림자가 눈앞에 어련그렸을때의 그 놀라움이란 ............

다행이 민망한 모습은 안 보여 드렸지만 그때 놀란 가슴은 아직까지도 가슴을 벌렁거리게 했다.

 

다음날 남편은 그 쪽방문을 걸어 잠갔는데 이게 조손간에 갈등을 빚는 계기가 될 줄이야...

"내가 멀 훔쳐 갈까봐 문을 잠갔냐..........."

이상한 이유를 끌어다 붙히신 할머니는 노발대발 하시면서 난리를 피우셨다.

 

남편은 손이 발이 되도록 빌고 덩달아 나도 죄인취급 당했었다.

그뒤로 우리는 아예 쪽방문을 활짝 열어놓고 잤다......

그러니 부부간에 나눌수 있는 그 어떤 정담이나 행위는  완전히  박탈 당해야 했다.

할머니는 시도 때도 없이 -특히 밤에 - 우리방 문턱을 드나들었고 그때마다 난 번번이 긴장하고 가슴졸이며 새우잠을 자야 했다.

 

시아버님이 아시곤 할머님을 나무라셨는데 이일이 빌미가 되어서 우리부부에겐 두고두고 흉거리로 남았다

심성이 별로 곱지 않으셨던 할머니는 아들내외에게 쏘아댔던 질투심을 손자에게 돌리셨고,

그 틈에서 난 샌드위치 같은 그 억눌린 심사를 고스란히 가슴에 묻은채 신혼을 보내야 했다.

 

나에게 신혼이란 막연한 환상에 불과했고 시집살이로 등식을 성립 시키고 싶다.

일일이 열거 하기가 쉽지 않았던 나의 스물하고도 세해전의 기억이 새삼 살아나는건 이젠

살면서 뒤돌아볼 여유라는걸 가질수 있는 나이가 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고생은 했지만 참으로 맘속에 담아둔 어른들에 대한 애틋한 정은 아직까지 식어지질 않는다

무엇보다도 나와 내 아이들에게 쏟은 그 어른들의 넘치는 사랑은 내가 다시 태어난들 갚아도 갚아도 못갚을 빚이었다.

 

이젠 고인이 되신 시부모님의 산소에 가면 항상 엎드려 비는게 있다.

'앞으로도 지금 살고 있는것 만큼만 살수 있게 도와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