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고시절 어느 겨울 방학 때 단짝 친구였던 s와 함께 사직공원 앞에서 10시까지 만나기로 약속을 하였다. 그 즈음의 우리들은 마땅히 갈곳이 없었기 때문에 주로 약속장소를 공원으로 많이 정하였다. 눈이 유난히 많이 온 그 해 방학동안 학교에서 한시도 떨어져서 못 살 것 같았던 s와 오랫만의 만남에 설레이는 마음으로 조금 일찍 약속장소에 도착하였다.
하얗게 눈이 쌓인 사직공원의 나무들을 무심히 바라보며 s를 기다렸다. 약속시간이 훨씬 지난 11시가 되어도 오지 않는 s를 기다리며 버스정거장과 사직공원의 정문 앞을 서성이기를 1시간이 지나고 또 30분이 지났다. 볼은 발갛게 얼어붙고 발끝이 시려왔지만 s를 만난다는 마음에 별 생각 없이 기다린 것 같다. 나보다 늦게 온 사람들도 하나 둘 일행을 만나 떠나가고 거의 2시간을 꼬박 선 채로 기다리는 나를 힐끔힐끔 이상하게 쳐다보는 이도 있어 안절부절 하는데 전화가 떠올랐다. 지금은 손전화기가 많이 보급되어 전화하기가 쉽지만 그 시절엔 주홍색의 전화기였는데 공중전화도 흔하지 않았다.
s에게 전화을 하였다. 신호음이 울리고 s의 어머니가 전화를 받으셨는데, 인사를 하고 s를 바꿔달라고 했더니s가 잔다며 기다리라고 하였다. 큰 소리로 s를 부르는 어머니 목소리 저편으로 잠에서 덜 깬 s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순간 난 너무 화가 나서 '지금이 몇 시야' 하고 소리쳤다. 놀란 s는 당황하여 어쩔 줄 을 모르며 약속한 것을 잊어버렸다고 하였다. s가 집에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몇 시쯤에 출발했는지 알려고 한 전화기에서 들려오는 s의 목소리는 나를 분노하게 만들었다. 어떻게 집에 왔는지 아무런 기억이 없는데. 난 그 날 심한 열 감기로 밤새 끙끙 앓았다.
s에게서 몇 번의 전화가 와도 받지 않았고, 편지가 와도 찣어 버렸다. 그렇게 겨울 방학이 끝나고 개학을 하여 다시 s와의 재회가 이루어졌다.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외면해 버리는 내 옆을 서성거리며 s는 수많은 쪽지편지와, 친구들을 동원하여 화해를 요청했지만 사직공원에서 얼어붙은 마음을 녹이기엔 부족하였다. s를 외면하는 내 마음도 편치 않았지만 마음으로 용서가 되지 않았기에 s만큼 힘이 들었다.
짧은 봄방학이 끝나고 새 학년이 되었다. 우리는 다른 반이 되어 더 이상 불편하게 부딪히지 않아도 되었기에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편하게 학교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부터인가 또 책상 위에 s의 쪽지편지가 놓여있기 시작하였다. 처음엔 찣어 버렸지만 어느 정도 마음이 풀어졌는지 내용이 궁금해졌다. 쪽지의 내용은 모두 '미안하다, 다시 좋은 친구로 만났으면 좋겠다, 너와의 우정을 간직하고 싶어' 등등 구구절절 s의 마음을 적어 놓았다. 그래도 새 학년의 친구들과 즐겁게 하교생활을 하며 애써 외면하였다.
3월 어느 날 화장실을 다녀오니 책상 위에 커다란 선물 꾸러미가 놓여 있었다. s가 가져다 놓았다고 하였다. 그 날은 내 생일이었는데 학기초인지라 아주 친한 단짝 친구 몇 명만 알고 있었다. s의 선물로 인하여 반 친구들 모두가 알게 되었고 많은 친구들로부터 생일 축하를 받았다. s가 가져다 놓은 커다란 선물 꾸러미를 내려다보며 너무 했다는 미안함과 함께 마음이 무거웠다. 선물과 함께 들어있는 s의 편지를 읽었다.'약속이란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너로 인해 알게 되었고, 난 평생동안 약속을 생명같이 소중하게 생각할거야' 많은 얘기들이 있었지만 가끔씩 생각나는 s의 편지 내용이다.
다시 옛날로 돌아가 20여 년이 훨씬 지난 지금까지 서로의 마음을 아껴주는 친구가 되어있는 s는 나의 가장 소중한 친구이다. 가끔씩 s는 가족들과 함께 우리 집에 와서 묵고 간다. 남편들과 아이들만 남겨두고 둘이서 오붓하게 술잔을 기울이는 보물 같은 친구를 약속 때문에 잃어버릴 뻔하였다.
아무 뜻 없이 한 약속 때문에 상대방의 인생이 바뀔 수 있고 소중한 사람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약속은 꼭 지켜야 하고 지키지 못 할 약속은 하지 말아야 하며 부득이 지키지 못 할 때에는 상대방에게 가장 피해가 가지 않게 하여야 한다. 더 중요한 것은 약속을 지킬 수 없었던 상대를 이해하고 포용하여 기회를 주는 아량이라고 생각한다. 누구나 피치 못하게 약속을 지킬 수 없는 상황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약속을 지키지 못한 s보다 약속 때문에 소중한 것을 잃어버릴 뻔한 나 같은 어리석음이 없었으면 하는 바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