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치아를 출발한 기차가 나폴리에 도착한것은 다음날 아침이었습니다.
우리가 내릴 역에 도착하기전
우리는 차례차례 돌아가며 양치하고 세수하고
머리도 빗고 로션도 바르고
밤새 지저분한 기차에서 구겨져 잤던 꾀제제한 몰골을
인간의 형상으로 바꾸었습니다.
나폴리...
세계의 3대 미항이라던가...
기차에서 내리는데 후끈! 하고 찜통속의 수증기가 밀려오는듯 하더군요.
숨이 턱턱 막히는데
우리는 먼저 대합실로 들어가 큰베낭을 맡긴후
로마로 가는 기차시간을 확인했습니다.
낮부터 밤까지 로마로 가는 기차는 수두룩 하더군요.
나폴리의 대합실 풍경은
후끈후끈 찜질방속 같은 더위에 지친 어느 할머니는
대합실 의자에 앉아 머리를 가방위에 떨어트리고
잠이 들어 있는데
'어머! 저할머니 죽은거 아니야?'
라는 생각이 들도록 할머니 모습에서 생기를 찾아볼 수 없었으며
기차표를 사는 창구옆에서는
꼬질꼬질 더러운 옷과 모자른 쓴 거지가
표사고 받은 거스름돈중에서 적선을 하라며 손을 내밀고 있었으며
대합실 이곳저곳에서 거지들이 떼로 몰려 있어
여권이며 중요물건이 든 가방을 메고
아랫배가 불룩하게 현금이며 돌아갈 비행기표가 든 전대를 찬 나는
신경이 바짝 쓰였습니다.
나폴리에서는 폼페이 유적지를 관람하기로 계획돼 있었습니다.
폼페이는 로마인의 휴양지로 유명했던곳이며
화려했던 로마인의 생활 모습이 화산재 더미 속에 숨겨져 있던곳.
그당시 벽화며, 난잡했던 로마인의 성문화까지 볼 수 있다는곳.
갑자기 밀려오는 화산재에 대한 공포로 일그러진 그순간 표정까지
느낄 수 있는 그시대 사람들의 석고상.
그곳에 꼭 가보리라고 작정을 했습니다만...
바깥을 내다보니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 뙤약볕에 나가서 폼페이의 유적지를 돌아다녔다가는
머리카락에 불이 붙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폼페이 현장으로 가는 대신
폼페이의 유물이 보관돼 있는 나폴리 박물관으로 가자는데
다섯명 모두 만장일치로 동의를 했습니다.
공주의 무열왕릉에서 나온 유물은 몽땅다 공주박물관에 전시돼 있고
정작 무열왕릉에는 맨 모조품만 늘려져 있어
볼만한것은 공주박물관에 모두 있는것처럼
이 더위에 시원한 박물관에서
폼페이 유물을 관람하는게 백번 옳은 일이라 해석을 하면서 말입니다.
지하철을 타고 박물관 근처역에서 내려 박물관을 향해 걷는데...
지글지글 내리쬐는 더위는 아스팔트를 녹여버릴듯 하더군요.
여기저기 건물 밑에 그늘이 있는곳이면
뚱뚱한 남자들이 윗통을 벗어던진채
잠자고 있었으며
건물도 후줄근한데다 여기저기 벽마다 스프레 낙서가 돼 있는것이
못사는 도시구나 하는 느낌이 절로 들었습니다.
아뭏든
시원한 박물관에서는 천천히 돌아보며 구경을 잘했습니다.
박물관에 들리면 의례히 있는 밥그릇 숟가락 이며 장신구
그림들... 특히 화산이 폭발하면서 아이를 끓어안고 겁에 질린채
죽어간 실제 그사람들의 모습을 화산재 더미속에서 떠낸 석고상등
볼거리가 많았습니다.
구경한번 잘하고나서.
밖으로 나오니 그 지글지글 내리쬐는 햇빛은 여전한데
배가 엄청시리 고파왔습니다.
날은 덥고 배는 고프고
당연히 인상이 구겨졌습니다.
인상이 구겨지긴 남편도 마찬가지.
박물관 앞 계단 그늘에 앉아 있으면
남편, 자기가 점심 먹을만한데를 찾아보고 오겠다며
땡볕아래로 걸어가더군요.
구겨진 얼굴로.
그리고 한참만에 돌아와서
더워서 많이는 못가겠고 요 근처에 핏자와 스파게티하는 식당이 있는데
갑도 싸고 자릿세도 없으며 음료수도 준다니
가자고 하더군요.
그래 배고픈 아이들을 데리고 그 식당을 찾아가다가
마침 문을 연 슈퍼에 물을 사러 들렸습니다.
이곳은 씨에스타라고 낮잠자는 시간이 오후 2시부터 4시까지 정해져 있는데
그시간엔 가게문도 식당문도 모두 닫아 버려
먹을물이 다 떨어진 우리는 얼른 물을 챙겨놓아야 했습니다.
이것 저것 과자며 콜라 물을 찾아들었는데
남편은 저쪽 구석에서
웬 똥똥하고 주둥이가 짧은 갈색병을 집어들고 상표를 들여다 보고 있었습니다.
상표에는 머리긴 여자그림이 붙어 있는것이
생긴것은 꼭 시골살때 보았던 농약병같더군요.
여행객으로는 아무데도 쓸데없는 농약은 분명 아닐것이고
그럼, 혹시, 술좋아하는 남편이 독한 나폴리 술을 사는거 아닌가?
생각하며
"그거 뭔데?"
하고 소리쳐 물었습니다.
그러자 남편은 닷짜고짜 소리를 버럭 질러 대답하길
"뭐긴 뭐야"
하는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계산대위로 그걸 들고 왔는데
나를 노려보는 눈이 썬그라스안에서도 어찌나
짜증과 화가 섞여 서릿발 같은 빛을 발하는지
간담이 서늘하게 무섭더군요.
"아니, 그냥 그게 뭐냐구"
꼬리를 바짝 낮추고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얼버무렸는데도
그의 눈과 얼굴은 그병을 바닥에 집어던져
박살을 내고 말것같은 표정이었습니다.
아니, 내가 뭐랬냐고요.
그이상한걸 사길래. 혹시 이 더운 날씨에 독한 양주를 사서
마시면 큰일이겠다 싶은 생각에
그걸 사지 말라 소리도 못하고 그저,
그게 뭐냐고 물었을뿐인데
그렇게 무섭게 화를 낼 일이냐고요...
그때부터 애들과 저는 남편 눈치를 살피며
줄래줄래 음식점으로 가서
시켜주는대로 핏자와 스파게티와 음료수를 먹었는데..
핏자는 꼭 내가 어렸을때 엄마가 칼국수 썰다 남겨준 꼬랑지를
잿불에 구어 먹었던 그 찝질한 밀가루 반죽위에다
도마토를 갈아서 얹어주는것이었고
스파게티는 딱딱한 삶은 국수위에 도마토 으깨서 뿌려준것이랑
똑같은 맛이었습니다만
우리는 끽소리도 못내고
그것들을 남김없이 먹고는
그길로 나폴리 역으로 돌아와
일찌감치 기차를 타고 로마로 가고 말았답니다.
그럼 그 농약병같이 생긴건 뭐였나 하면
맥주였습니다.
여성용 맥주...
로마에서 저녁지어먹고 빨래해 널고 샤워 하고
그 맥주를 나눠 마시면서
다음날 부터 서로 화내지 않고 다니자고
말없이
말을 주고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