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은 밤새 언덕위의 하얀 집을 오르는 꿈을 꾸었지요.
콘크리트 벽으로 된 6층의 건물이거든요?
그곳은 건물의 중간 층부터는 창밖으로 쇠창살이 둘러 쌓여 있는 곳 이지요.
아지랭이 아른 거리던 봄부터 파란 고추가 벌겋게 속타들어 가던 가을까지
창안의 사람들은 유리문을 열어 놓고 세로로 질러 놓은 쇠창살을 붙잡고 바람
을 쐬곤 하였지요.
언덕배기를 훌쩍 올라 온 바람이 쇠창살에 부딪힐 때면 창안의 사람들은 바람이
넘어 왔던 언덕 너머의 하늘과 맞닿을 듯한 작은 능선을 바라보며 머리의 가르마
처럼 난 ㄱ자 모양의 길위에 방랑의 꿈을 품어 보기도 했지요.
그 곳은 출입문에도 쇠창살이 둘러져 있습니다.
참 쇠창살안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 얘길 해야겠군요.
정신 질환을 앓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죠.
쇠창살을 드나드는 날더러는 사람들이 '이또짱'이라 불렀었지요.
이는 성이요, 또라이 '또'에 대장이라는 뜻이랍니다.
난 하루 일과가 끝나면 대체로 언덕 아래의 길로 내려가 주변의 경치를 눈도장찍어
그들에게 상세히 들려 주곤 하였지요.
하얀 집이 있는 언덕 아래엔 세 갈래의 길이 있었지요.
갈래의 중심엔 시계탑이 있었고 시계탑의 오른쪽은 바다로 난 길이었고요.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바닷가의 비릿한 내음은 바람에 실려 길로 떠내려 왔고,
몸살치던 바닷물의 가는 물입자를 날라와 내 세포위에 얹으며 바다로 오도록 날
유혹하곤 했지요.
바닷가로 난 길은 좁고 고불고불한 길이었읍니다.
가끔은 이슬먹은 억새풀이 발목을 휘감기도 하고 가끔은 날 세운 풀잎에 발목이
베이기도 했지요.
이른 봄엔 물미역이 세찬 물살에 뿌리채 뽑혀 백사장에 길게 누워 있기도 했고
나는 비린내 나는 그것을 말려 창안의 사람들에게 맛을 보여 주기도 했지요.
여름이면 고기를 잡으러 왔던 낚시군의 얘기며 바다 수영을 하다 잃어버린 어떤
아가씨의 비키니 수영복 얘기를 맛깔나게 해주기도 했지요.
가을엔 바닷가에 핀 들국화의 향기와 바람에 흔들거리는 갈대의 이야기를... 아!!
정말 중요한 걸 빼 놓을 뻔 했군요.
늦가을 바닷물살에 누워 흔들거리던 달빛의 몸놀림을 얘기 했지요.
그리고 겨울 신새벽 어둠을 가르며 달리던 바닷가 옆 기차속에서 품어 나왔던 하얀
연기가 하늘속으로 사라지는 모습도요.
아! 이야길 하다보니 바다로 난 길만 장황하게 늘어 놨군요.
다시 거슬러 올라가 세 갈래 길의 중심인 시계탑에서 마주 보이는 시청 가는 길에
대해서 얘기 해야겠군요.
약간 경사진 그 길은 그 도시에서 유일하게 포장이 되지 않은 도로였어요.
길 아래엔 신 시가지가 들어서 번쩍거리는데 반해 그 길은 차가한번 지나가면 먼지가
퍼석거리는 시골길이었어요.
시가지 초입엔 경찰서가 있었지요.
경찰서.
그 건물만 생각하면 지금도 소름이 오싹하지요.
언덕위 하얀집에 살던 나는 경찰서에 자주 불려 다녔지요.
그 집은 사건 사고가 많은 집이었거든요.
허긴 정신 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대략 400명 가량되었고 환자를 돌보는 간호사,
조무사, 생활사..등 약60명의 관리자가 있었지요.
그곳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생활보호 대상자여서 국비로 생활을 꾸려 나가는데 의식주가
열악한 편이지요.
보호자가 없거나 아예 장기 질환으로 사람에 대한 희망을 포기한 가족들이 면회조차
오지 않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 누군가가 너 죽어 하는 것 같은 망상이 있는 사람들, 그냥 지금이
답답하고 권태로움을 못 이기는 사람들...
그들 중 어떤이는 밤에 자신의 환의로 목을 감아 죽음을 선택하기도 하고, 어떤이는 쇠창
살을 야금야금 갈아서 뽑아진 창살을 헤집고 몸을 날리기도 합니다.
그런 날 아침이면 병동 책임자인 나는 의례히 그리고 그 날밤 담당 근무자들은 자살 경위와
책임 부분에 대한 조사를 받게 됩니다.
난 내게 여러번 반복해서 묻는 심문보다 갓 스물을 넘은 어린 조무사의 겁에 질린 눈망울이
안스러워 지기도 하고, 평상시 점잖고 나이어린 상관에게도 아주 협조적인 55세 되신 생활사
김선생님이 아들같은 경찰들에게 푸대접 받는 것이 안타까워 가슴을 동동여야 했습니다.
아카시아 향 날리던 오월의 어느날 이야기를 해야 겠군요.
그날도 우린 오전 10시에 불려가 밤 12시가 되어서 풀려 나왔지요.
경찰과 병원의 물밑 협상이 결렬 되었나 봅니다.
억류된 우리는 그 날 가장 푸대접을 받아야 했지요.
아침에 혹시나 해서 가져간 가방에 우유 3개가 그날 7명의 일용할 양식이었지요.
입이 마르거나 배가 꼬르륵할때 우유 몇 방울을 돌아가며 입속에 넣었던 눈물겨운
추억이기도 하구요.
밤 12시가 되어 풀려난 우린 푸석한 그 길위에서 마른 먼지를 맡으며 서로를
위로하기위해 어깨동무를 하며 동구밖 과수원길 ~ ~ 노래를 부르며 아카시아 향
나는 그길을 걸어서 병원엘 왔지요.
병원엘 왔더니 기다리던 상관 중 최고 책임자인 이사장님 내 멱살을 잡으며
"개 자식 너가 수사에 비협조적이라 여지껏~~" 하며 억지를 부리십니다.
사표를 던져 버린 그날 난 한잠을 이룰 수가 없었지요.
젊은 사람이 이력서 내면 어디 못가리오만 사계절 피복이 부족해 이가 부글거리던
병동의 이 빨래는 어찌 할것이며, 흔해 빠진 플라스틱 슬리퍼도 부족해 동각난
뒤축으로 화장실 드나들던 그 불쌍한 발에 신길 신발을 위해 누가 투쟁을 해줄것
인지 가슴이 답답하고 먹먹하였지요.
다행히 사표 수리가 되지 않아 나는 다음 날부터 DDT로 절여 놓은 이 빨래를 하며
몇 해를 더 보낼 수 있었지요.
이제 시계탑 뒤쪽의 ㄱ자 길에 대한 이야기가 남았군요.
남동쪽 쇠창살로 마주 보이는 ㄱ자의 고부라진 길은 유난히 떠나고 싶은 유혹을
갖게 했던 길이지요.
내가 떠나오기 얼마전 이십대의 젊디 젊은 광수가 선생님요 나 저길 땜에 미치
겠어요. 저 길이 날 오라 유혹하는데 이놈의 창살이.... 하던 그 광수가
스스로 목을 메 죽음을 선택했지요.
시집살이 매운 맛보다 더 쓰리고 맵던 병동생활을 떠나볼까나? 지독히 유혹하던길
무던히도 참고 참으며 마음을 곱씹었었는데....
아버지의 중풍 재발로 아버지가 마지막하시던 사업을 도와야 했던 나는 그 언덕을
넘어 그곳을 떠나와야 했습니다.
그 곳을 떠나 오던 날 그들은 내게 창살 너머로 종이 비행기를 날려 주었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오던 무수한 종이 조각과 한숨과 눈물까지 감싸안으며
난 이십대의 마지막 언덕을 그 고개를 넘으며 새로운 세상으로 오게 되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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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난 며칠간 마음 앓이를 많이 했답니다.
마을에서 쫒겨 나야합니다.
이유는 노인을 모시기때문이라 합니다.
이곳에는 아픈 어른있는 곳이 마치 핵 폐기물 처리장이 있는 곳 쯤으로 생각합니다.
더 이상의 타협은 어려울 것 같고 준비할 기한 만이라도 연장을 해 달라 해야
할것 같습니다.
어젯밤엔 밤새 꿈을 꾸었습니다.
길에서 길을 잃었었습니다.
한참 헤메다 들어섰던 것이 시계탑이 있던 세 갈래의 길이었습니다.
내 젊음과 꿈과 열정과 사랑이 담겨 잇던 언덕위의 하얀집으로 통하던 그 길입니다.
시계탑속의 시계엔 15년전 내가 떠나오던 날짜와 시간이 그대로 정지되어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