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작가

이슈토론
창업박람회 65세 이상 관람객 단독 입장 제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배너_03
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조회 : 252

◐ 쪽진머리 우리할머니가 보고싶어...


BY 산,나리 2004-05-04

 

봄비가 소리없이 하루내내 내리고 머릿골이 띵한게 감기 증세를 떨쳐 버리지 못하고

콧속에서 약 냄새가 나 역겹고 지겹다.


빨리 기운을 차리고 싶다.

작년 겨울부터 감기를 달고 살아 이제는 몽롱해지기 일쑤고 자꾸만 멍청 해지는거 같아

몸관리 하나 못하는 내 게으름에 내가 내가 싫다.


얼마 남지도 않은 하얀 머리칼이나마 예쁘게 비녀를 꽂아 붙인 TV속 화면의 구순 할머니의

뒷모습에서 오년전에 돌아 가신 할머니가 울컥 보고 싶다.

이런걸 두고 있을때 잘하라라는 유행가 가사도 만들어 졌을거라 생각된다.


버릇 없는 말투이겠지만 할머니와 어린 아이들과 강아지는 귀엽다라는 공통점이 있다.


어린시절 우리집은 3세대가 함께 사는 대가족의 가족 구성을 이루고 조마그한 읍내

지금의 나의 고향에서 그런대로 행복하게 살아 갔다.


우리 할머니는 젊어서부터 생활력이 강하신 억측 아줌마 스타일이셨고 엄마는 약간의

공주끼가 있는 나약하고 고생을 많이 안하고 농촌으로 시집온 도회지형 신세대

여성이었던로 여겨진다.


그런 할머니와 엄마의 사이는 좋은 날보다 나쁜날이 더 많은 것 같았고 큰손녀인 나는

솔직히 말하면 매사에 당차고 강하신 할머니보다 순하고 약해(여러 모로..) 보인 엄마가

좀더 좋았고 할머니가 원망스러운 날도 있었다.


하지만 할머니는 가을에 태어 난 내 생일엔 그 해의 햅쌀로 꼭 찰밥이나 호박떡을 해주셨고

따뜻한 연탄불 가에 우리를 앉혀 놓고 새끼 조기 생선을 연신 구워 생선 뼈를 발라가며

나와 동생에게 호호 불며 먹이시곤 하였다.


내가 여고를 다닐 무렵엔 우리집이 소히 몰락을 하여 할머니와 아버지와 나만 고향에 남고

엄마와 동생들은 대도시에 터를 잡겠다고 이사를 했다.


그때부터 내도시락은 고슬 고슬 촉촉한 밥 대신에 물기가 질펀한 떡밥으로 할머니가

싸 주셨고 적당히 파삭거리면서 매콤 달콤한 고추장 양념이 듬뿍 발라진 멸치 볶음

대신에 대충 허옇게 담아진 부추김치로 바뀌었다.


난 도시락 뚜껑을 열고 뚜껑에 아직도 물기가 밥풀과 짓이겨져 끈적이는 그것을 보면서

한두젖가락 먹다가 그대로 가져오기가 일쑤였고 엄마와 동생들이 그립고 보고 싶고

 바뀌어진 우리집 환경에 늘 우울하고 슬펐지만 꾹꾹 참았다.


할머니는 그런 나를 철 없다는 듯이 도시락을 먹어야 힘이 나서 공부 할 것 아니냐고

한두마디로만 나무라시고 크게 꾸짖진 않으셨다.


그후로 아버지의 근무지로 할머니는 따라 다니시며 나랏밥을 먹어야 될 사람이라고

절대 사표를 못 내게 하시며 아버지 뒷 수발을 들고 따라 다니셨다.


난 여고를 졸업하고는 엄마와 동생들이 사는 대도시로 합류 했고 동생들의 방학이면

할머니와 아버지가 계시는 남쪽바다 섬마을로 한번씩 가곤 했었다.

며칠동안은 그 옛날 고향땅에서 옹기종기 모여 살던 그모습대로 웃고 떠들고 섬의

여기저기를 구경하며  시름을 잊었었다.

할머니도 우리를 바라보시며 대견해 하셨고 행복해 하셨다.


우리가 배를 타고 떠나는 날에는 할머니는 내가 이 섬에서 우리 손자, 손녀들

얼굴도 못보고 죽어 갈지 모르다며 마지막인 듯 늘 애닯아 하셨다.

 

언제까지나 한동안 나를 가슴 아프게 했던건 배가 들고 나는 선창가에 작은 배를 묶어 놓는

나무 기둥을 붙잡고 우리를 배웅 해주시며 눈물을 훔치셨던 할머니 모습에 우리 또한

할머니와 헤어지면서 엉엉 눈물을 흘렸고 가슴이 터질건만 같았다.


그렇게 한움큼도 못 되는 머리칼을 비녀로 예쁘게 또아리신 할머니는 내가 시집 가는것도

보시고 내신랑을 큰 손녀 사위라고 ‘최서방..최서방..’ 하시며 얼마나 예뻐 하셨는지

요즘에는 옆지기가 오히려 가끔 그리움에 들먹거린다.

 

내가 큰녀석을 낳아 할머니를 뵈러 갔더니 사내 녀석이 뒷꼭지 틀어지면 안된다시며

간난애 머리 맡을 떠나시지 않고 앉으셔서는 자는 아이 머리를 고쳐 주곤 하셨고

할머니의 꼬깃꼬깃 용돈 뭉치를 간난 녀석 손에 증조 할머니가 옷 사주는거라며

꽂아 놓으셨다.


할머니가 식음을 놓으셨다는 아버지의 전화를 받고 우리 4형제가 달려 갔을때는

할머니는 우리 할머니가 아닌 모습으로 깡 마른 얼굴로 우릴 그래도 알아 보셨다.


한사람 한사람 우리에게 당부의 말씀을 소곤 거리듯 또박 또박 표현 하셨고 특히 나에겐

그때 할머니가 우리집 살림을 생각해서 맛있는 도시락 반찬 못해줘서 못내 걸리고

지금까지 미안했다고 말씀하셔서 내가 눈앞이 안보일 정도로 울었던 기억이 난다.


아~~~~~~~~~~ 우리 할머니!


우리가 간다는 기별이 닿으면 기름 발라 예쁘게 쪽진 머리 가다듬고 목련 꽃잎처럼 하얗게

흰고무신 닦아 신고 행여 언제 오나 문밖에서 우릴 기다리시던 할머니...

따사로운 햇볕 자락에 고즈넉이 앉으셔서 우리들 많이 커 살아 가는 모습 웃으며

바라 봐 주시던 할머니...

엄마는 부끄럽다고 금방 떼어 버린 엉성한 색종이 카네이션을 할머니는 하루 종일

동네방네 다저녁때까지 용감하게 달고 다니시던 할머니...


할머니는 지금 안계신다.

하지만 한국에 할머니의 표본이신 내 할머니는 언제나 내 가슴 한켠에

조그맣게 앉아 계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