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가 차분하게 내린다.
버스를 타고 창가에 앉으니 이런 분위기를 그대로 실고서 어디론지 끝없이 달려가고 싶었다.
틀에 짜여진 직장이 힘겹고 지겨울 때
생활고에 실달려 넋놓고 누워만 있고 싶을 때
사랑하던 사람이 떠나려는 시간이 다가옴을 느낄 때
옛추억이 보고싶어 슬픈 가요가 내 경험으로 다가 올 때
난 어디로든 떠났었다.
그 자리에서 아무 준비도 없이 떠날 수 있는 교통수단은 시내버스였다.
버스정류장에 서서 아무 버스나 손 흔들어 잡아 타고 떠나면 된다.
경비도 적게 들고 시간도 많이 잡아 먹지 않고
사람들이 시선이 집중되지 않아서 내가 자주 써먹는 방법이었다.
이럴때는 될 수 있는대로 멀리 가는 버스를 타든지 주변 경관이 좋은 곳으로 가던지하면
지루하지 않고 흔들리는 버스와 같이 흔들리는 마음을 실고 종점까지 갔었다.
버스를 이용해서 나를 다스리던 때는 처녀때였고
한동안 안 써먹고 있다가 장사를 시작한지 얼마 안되어서
손님 때문에 꼬장꼬장했던 내 성격을 숙이고 자존심이 상해
출퇴근하던 88번 버스를 타고 무작정 달려 갔었다.
일산만 순회하는 시내 버스라서 자존심을 버릴사이도 없이 종점에 다달았었다.
그래서 다시 그 자리에서 88번을 타고 반대편 종점까지 가고
그래도 풀리지 않아 다시 또 그 버스를 타고 또 종점까지 가고...
그러다가 보니 처음에 탄 운전수 아저씨를 다시 만나서
괜히 창피한 마음에 중간에 내려서 집에까지 눈물을 닦아내며 걸어온 적이 있었다.
그 다음은 주말이나 휴일을 이용해 기차를 타고 떠났었다.
대부분 춘천행 기차를 탔다.
그곳으로 가는 기차는 지쳐 울고싶은 나를 때깔좋은 창밖풍경이 달래 주었고
고향쪽이라 그런지 외지의 낯설음이 없고 외할머니가 춘천에 살고 계셔서
자주 다녔던 곳이라 친근함까지 붙어 있던 곳이라
아주 쉽게 적은 돈으로 춘천행 기차를 탔었다.
점심은 거의 굶다시피 하고 가끔 곰보빵 하나에 우유를 마셨다.
얼굴이 문드러지도록 차창에 들이밀고 한가지 생각에 빠져 있을 때면
낯선 남자가 내 옆에 다가왔었다.하나같이 그랬다.
혼자하는 여행일 때면 남자들이 비어있는 내 옆자리에 스멸거리며 앉아서 수작을 떨었다.
"어디까지 가시나요?"
"고향이 강원도신가요?"
"음료수 마시겠습니까?"
난 그 자리에 부동자세로 앉아 그 표정 그대로 창밖에 얼굴을 더 바짝 들이밀고 있으면
한 십여분 그러다가 남자들은 다들 떠났다.
여기서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간혹 여자친구들이나 직장동료들이 나는 그 남자 정말 싫은데
남자들이 치근덕 거리며 계속 따라 온다고 하면 그건 여자 책임이 크다고 믿는다.
나를 따라온 남자들은 기차에서든 길거리에서든 직장에서든
설령 서로 좋아하다가 싫으졌을 때에라도
내가 무관심하면 남자들은 절대 여자를 괴롭히거나 더 이상 따라다니질 않는다.
그렇게 창밖만 보다가 춘천에 도착해서 대합실을 휘둘러보고
화장실 한번 갔다와서 되돌아오는 기차를 타면
자주빛으로 물들고 있는 해거름의 강언덕을 볼 수 있었다.
"산다는게 말이야 별게 아닌데...아침이 있으면 저녁이 오는데..."
"이렇게 아름다운 자연은 다 내것인데,이걸 두고 내가 세상을 등질 이유가 뭐가 있어..."
단 한번 기차를 타고 멀리 떠난적이 있었다.
남편은 내 인생에 가시덤불이었고 자식은 내 숨통을 묶어 논 끈일뿐이었다.
가시에 찔려 견딜수 없이 아프고 숨이 박혀 질식사 직전이었다.
어디로든 가서는 서로 상처만 입히는 결혼생활을 단판 짓고 싶었다.
그래서 선택한 곳이 기차였고 목적지는 전남광주였다.
그곳엔 첫사랑이 살고 있었고 내 젊은날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었다.
쓰레기 버리러 간다며 쓰레기를 들고 나와서는 쓰레기통에 쓰레기 봉지가 터지도록 집어 던지고
서울역으로 향한 버스를 탔다.
마지막 기차 시간만 남아 있었다.
막차....여기서 끝이고 싶었다.
가서는 돌아오지 않으리...가서는 내 꿈을 찾고 내 젊은날의 추억을 되살려 놓으리...
목적지인 광주에 도착한 시간은 새벽 4시였다.
대합실에서 고개를 숙이고 아침이 오길 기다리다가
첫사랑의 고향인 해남 땅끝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그러나 난 더 이상은 가지 못하고 단판도 내지 못하고 집으로 향하는 기차를 타고 말았다.
비가 차분하게 꽃잎속에 스며든다.
떨어진 꽃잎은 그 자리에 그림자되어 누워있다.
버스를 타고 시골길을 달려가고 싶다.
기차표를 끊고 강으로 이어진 춘천엘 다시 가고싶다.
낯선 남자가 수작을 부릴까? 그럼 대답을 해봐야겠다.그 다음엔 뭔일이 생길지...후훗
마침표를 찍었던 첫사랑이 배불리 밥쳐먹고 길게 자빠져 자고 있는 광주로 가면 안되겠지.
그곳엔 젊은날의 나는 죽었고
첫사랑은 이미 빛바래지고 찢겨진 편지로만 남았으니 부질없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