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회 : 358

아가씨, 아줌마, 할머니


BY 27kaksi 2003-12-24

벽위에 걸린 달력이 앙상하게 한장만 남았다.

이런 시간에는 '나이'라는 절대 숫자에 대하여 조금은 쓸쓸해진다.

여자와 남자모두 나이를 먹지만 남자보다는 여자가나이에 대해 더 민감

하다. "나이란 숫자에 불과하다"는 달콤한 광고도 있었지만 나이란 인간

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절대 순수, 절대고독, 절대권력과 같은것이다.

당신이 소녀였다가 어느 날 갑자기 '아가씨' 라고 불렸던 그 빛나는 순간

당신이 '아가씨'라는 빛나는 이름으로 불리다가 어느날 갑자기 '아줌마'

라고 불렸던 그 어색한 순간, 당신이 '아줌마'라는, 매력은 없지만 안정

된 이름으로 불리다가, 어느날 갑자기 '할머니' 라고 불렸던그 기막힌

순간을 아마도 당신을 잊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이란 소득세와 같아서 그 계산법이 다 다르다' 라는 말처럼 그 인지의

시간표는 누구나 조금씩은 다르겠지만,

단발머리를 갓 벗어난 어느 시간에 우리는 '아가씨' 라는 말을 처음

듣게 된다. 그런말을 처음 들었을때의 당신은 조금은 수줍고 조금은

자랑스러웠을 것이다. 그러나 당당한 '아가씨'인 당신은 그런 종류의

수줍음을 떨치고 멋진 두팔로 인생이라는 바다를 헤엄쳐 나갈 충분한

힘과 빛나는 긍지,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있다.

모든 불가능한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어느날 당신은 어김없이 '아줌마'라고 불리게 된다. 결혼 했다

고해서 금새 '아줌마'라고 불리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덧 '아줌마'라고

불리는 시기는 기습적으로 온다. '아줌마'라고 점원이 불렀을 때

일부러 외면하고 그냥 지나친 반발의 기억을 누구나 가지고 있다.

언젠가는 으리으리하게 차려 입은 멋진 독신 친구와 상점에 갔는데

점원이 그 친구에게도 '아줌마'라고 부르는것을 듣고 한참 전부터 이미

아줌마 였던 나의 마음속으로 고소한 안도의 감정이 스쳐 지나갔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

아, 저렇게 멋진 독신여성도 '아줌마'라고 불리는구나.....하고.

'아줌마'의 시간은 자기 시간이 아니고 가족을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는

이타적인 시간이고 발바닥에 불이 붙어서 산발하고 뛰어다니는,

몸안에 하얀젖과 풍요의 난자가 흘러 넘치는 달의 여신의 시간이다.

그러나 어느덧 '할머니'의 시간이 온다.

얼마전 집에 가스레인지가 고장이 나서 며칠동안 요리를 하지 못하고 지냈다.
가스 레인지를 고치려고 수리 기사를 불렀는데 그 기사가 점검해

보더니 이건 가스 레인지의 문제가 아니라 도시가스 공급의 문제인 것

같다고 하면서 도시 가스 회사에 전화를 걸어보라고 하였다.

그래서 도시가스 회사에 전화를 걸었는데무엇을 자세히 물어도 내가 답

변을 잘 못하니까 그럼 가스레인지 기사를 바꾸어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기사를 바꾸어 주었는데 수화기를 든 기사 왈,

"여기 할머니만 계셔서 아무것도 모르는것 같아요" 하는 것이었다.

집에는 분명 나 혼자 있는 참이었다. 그럼 그 수리기사가 말하는

할머니란 바로 나? 아니, 정말, 나?

불시에 '할머니 라는 말을 들은 나의 모습을 살펴보니 세수도 하지 않은

데다가 남편의 헌 운동복 바지에 딸이 버리라고 내던진 헐렁한 브이넥

스웨터를 입고 흰머리가 뻗친 모습이었으니 과연 그럴만도 하다고

수긍했다. 잠시 서운했지만 이상하게도 '할머니'라는 단어를 내가 수긍

하자마자 몸속으로 달의 여신과 해의 여신이 동시에 사지를 쭈욱 피며

늠름하게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할머니'라는 말은 이상하게도 담대한 자유의 감정을 주었으며 무엇인가

이제 가부장제의 틀을 한번 '뛰어넘은' 것 같은 해방된 기분을 주었다.

'할머니' 그 이름은 '소녀' 라는 이름과 마찬가지로 가부장제 바깥에

존재하는 순수하고 용감한 여신들의 성채라고 할 만 하였다.

영화 '디아워즈' 에서 맨하튼의 성공한 편집자 클라리사 (메릴스트립)

가 아름답고 지적인딸(클레어 데인즈) 에게 이렇게 말한다.

"20대의 어느날, 난 그아름다운순간이 완성되어 있음을 느꼈어, 그러면

서도 그 순간이 더 절정을 향하여 발전해 나갈 것이라고 상상했지

그러나 난 알게됐어. 그것은 발전의 문제가 아니라 그 자체로 완성된

것이었다는 것을, 그것이 전부야" 라고.

'삼십세' 라는 단편에서 잉게보르크 바하만은 이렇게 말하였다.

"일어나서 걸어라. 나이를 먹었다고 하여 나이만큼의 다리뼈가 부러진

것은 아니니......"

- 김승희의 여성이야기 중에서.-

이런글이 눈에 들어오는걸 보면 나도 이제 나이가 들은 모양이다.
아침조간에서 이글을 읽으며 어쩌면 내가쓴것 처럼 익숙했다.

글쓰는중에 작은 형님의 전화를 받았다.
" 어떻게 지내니?
다른 사람들도 한해가 간다고 만나서 식사라도 하는데
가족이라고 서로 얼굴도 볼 수 없으니, 보고싶다" 그러니
한번 오라는 말씀이셨다.

그래, 주위에 챙길 어른들에게 전화라도 드려야지....
모두 '할머니'라는 호칭을 갖고 지내시는 어른이 여럿인데......

노년이 됨은 쓸쓸함을 동반한 편안해지는 때일까? 아님 더 안타까운
시간들일까?
나의 멋진 노년을 위해 내가 준비해야 하는것은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