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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 타령만 할건가요


BY 김隱秘 2003-12-15

9. 아이들 타령만 할건가요

요즘 사람들의 상태를 살펴보면 너무도 황당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파편 조각같은 영혼들이 구심점을 잃어, 온유한 사람은 간데 없고 어찌하다가 모나고 각지고 뿔달린 사람들만 설치는 세상이 되었는지 심각한 현실이다.

아이들을 보면 더욱 한숨이 나온다. 소녀가 순결한 소녀가 아니다. 소년이 꿈많은 소년이 아니며 언제 돌변하여 흉기처럼 찌를지 모를 상황이다. 누가 이토록 이들의 영혼을 망가지게 만들었단 말인가. 그리고 앞으로는 어찌될것인가...

이 시대 아이들의 심성이 이토록 격해진 원인은 무얼까? 곰곰 생각하는 중에 감지된 영상은  남자와 여자가 사랑나누는 그 때, 그 사랑이 형성되는 순간에 아이의 심성이나 정서가 생성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사랑은 얼마나 아름다운 단어인가. 순수하고 정겹고 우아하고 아낌없이 주고 받으려는 마음 속에서 서로를 보듬어줄 때 사랑은 고고한 열매로 맺혀지건만 이 즈음의 사랑은 어찌보면 사랑이라기보다는 사랑을 빙자한 타락이라고 보아도 되지 않을런지

이웃집 남자를 넘보거니 아랫집 부인을 엿보는 남자들의 행태는 태고적부터 있었나보다. 그래서 동서고금의 경전에서도 간음에 대해 금기를 정해 놓고 있고 근친상간과 그의 폐해, 그리고 결과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하고 있음을 본다.

며느리와 시아버지의 애정 행각을 통하여 낳은 아이도 있고, 아버지와 딸이 동굴에서 술에 취해 낳은 후손들이 지금도 지구상에 존재하기에 이 땅은 늘 그런 간음과 근친상간의 피가 흐르고 있는것일까?

사랑이라는 단어는 옳은 길로 가면 너무나도 아름다운 구슬이지만 더럽고 추하고 이즈러진 방향으로의 가다보면 파멸의 결과를 낳고 만다. 추구하는 바가 어떤 방향으로 향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는 천냥지차를 보인다는 것이다.

요즘 대부분 아이들의 사랑의 추상은 어떨까?
쉽고 쉽게 생각하는 경향으로 물들어 가지 않는가?
아무렇게 나눠도 아무런 부담이 없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대다수로 짙어지고 있음을 본다

이혼율이 60%에 육박하는 현실은 인륜의 만남이라기 보다는 모든 것에 대한 생각이 진실하지 못하고 즉흥적이며 내일에 대한 사고나 결과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나타날 문제들의 심각성은 철저히 배제되어 숙고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증거다.

아이들의 영혼 유전자가 형성됨이 사랑의 순간 남자의 씨와 여자의 밭이 만나는 순간 형성된다라고 한다면, 사랑의 시작부터 잘못되어 타락한 영혼이 조종하고 추구하고 누리려는 발광의 몸부림속에서 분출되는 짐승보다 더 충격적인 순간의 아기는 그 결과가 뻔하지 않을까

그 씨의 자람과 결과는 벌레를 품은 고추의 꽃과같이 우량 상품(?)이 되기는 실로 어렵다는 것이다. 잘못된 씨가 박토에서 뒤틀린 상태로 척박한 심령을 가지고 태어 난 결과는 좋은 열매가 되기에는 특단의 노력이 아니면 힘들다는 것이다.

오늘 당신은 어떤 사랑을 나누고 있나?
비뚤어진 생각의 주인이 되는 어둠의 영에 사로잡혀 방황하다가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퍼득이면서 에라 모르겠다 아무곳에나 나의 진부한 고름을 떨구는 누를 범하지는 않는가?

영혼이 맑은 상태가 되지 않으면 사랑을 나누지 말라. 진실이 가슴에 없으면 사랑을 나누지 말라. 불안이 가슴에 도사리고 있다면 사랑은 안된다. 지금 추구하는 사랑이 수정처럼 맑은 모습이 아니면 결과에 대한 책임은 당신이 져야할 부메랑이다.

세상에는 책임 없는 것이 없다. 세상에 모든 씨앗은 결과를 나타낸다. 무엇이든 원인을 제공한자에게로 돌아가는 인과 응보의 법칙이 바로 세상이다. 우연이라고 생각하는 것조차 우연은 아니고 모든 것이 필연이라는 것이다.

사람 몸속을 드나드는 공기 한홉도 그냥 왔다가 가는게 아니다. 누군가에 의해 지불된 사랑의 결과라는 걸 알아야 한다. 누군가 만들어 사람에게 선사한 귀한 선물인데도 그저 무의식으로 지나치는 것일뿐이다.

오늘도 방황하는 영혼들이 자꾸 늘어난다. 화면을 메우는 모든 것들. 인터넷을 전전하는 많은 거미들. 핸드폰으로 날아드는 검은 나방들. 거리를 헤메며 자신의 마각을 세워 만족을 채우려는 하이에나들...

우린 이런때에 무엇을 지켜야 하나..
무엇이 우리가 찾아서 회복해야 할 대상인가?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네마음을 지켜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언4장23절)”

진리는 더러운 눈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돼지의 눈에는 돼지가 보이고 부처의 눈에는 부처가 보인단다. 보고 있는 현실. 지금 사고의 행태가 바로 자신의 신분을 말하는 것이다. 더러운 것을 욕한다 할지라도 욕하는 입이 깨끗하다는 증거는 아니다.

사랑을 준비하고 있는가?
사랑을 나눌 준비를 하고 있는가?
당신의 파트너를 구하고 있는가?

당신의 육신을 만족시켜줄 대상을 물색하고 있는가?
당신의 시간위에 즐거움을 나눌 동반자를 찾고 있는가?
당신의 아픔을 함께 나눌 사람을 원하는가?
당신과 더불어 아름다운 성을 쌓을 귀한 시간을 가지려 한다면 사랑을 나눌 준비를 정성껏하라. 금수처럼 그렇게 우리가 아무렇게나 사랑을 나눌 수는 없다. 하기야 미물에게도 주고받음의 철칙은 있다. 좋아하는 대상, 그리고 맘에 맞는 대상과만 사랑을 나눈다는 사실

세상은 사랑으로 시작 되었다.
이 세상의 시작은 사랑이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

천지를 창조하신 목적도 사랑의 발로다. 스스로 계신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것은 그분의 사랑함이다. 사람이라는 자신의 형상을 닮은 대상 인간을 구상하시고 그들이 평강으로 살아갈 나라를 만드시니 말하거니와 에덴이 아니겠는가

홀로 있는 것은 외롭다. 그런데 요즘은 홀로 지내는 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특히 독신녀의 숫자가 날로 늘어가고 있는 것이다. 귀찮아서 결혼을 안 한다거나, 혼자 살아도 불편함이 전혀 없으니 굳이 결혼이 필요하냐는 것이다.

직장에 다니고, 시간도 자유롭고, 하고 싶은 일을 은밀히 얼마든지 선호하는 것들을 찾아 즐길 수 있다는 이기적 장점을 우선순위에 두기에 인간 본래의 가족모습 보다는 광야의 사냥꾼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고할까. 화려한 싱글이라던가

어떤이들은 매 5년마다 계약을 해가며 산다는 얘기를 들은적이 있다. 그 의도가 어디에 있든 이제는 사람들의 모습이 날로 본래의 창조 질서에서 더욱 멀어지고 아주 못쓸 모습으로 이그러지고 있다는 느낌이다.

혹자는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할 수도 있으나 정말 이 세상의 진리는 양과 음의 나뉨과 화합의 존재로 구성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남자와 여자가 연합하여 한몸을 이룬다는 창조질서가 깨어진 사회의 결과는 파괴와 파멸과 실패와 후회와 분쟁과 미움과 서러움인데.....

고독· 중독· 울부짖음으로 금수가 되어 코를 꿴채 돌아올 수 없는 문으로 들어가는 도수장간의 소와 같이 백정의 칼을 기다리는 내일을 보장할 수 없는 멸망길의 모습을 방관하고 넘어갈 수 없나니 이 답답함이랴..

“ 내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라 그는 사랑스러운 암사슴같고 아름다운 암노루 같으니 너는 그품을 항상 족하게 여기며 그 사랑을 항상 연모하라 내 아들아 어찌하여 음녀를 연모하겠으며 어찌하여 이방 계집의 가슴을 안겠느냐(잠5:18-20)”

요즘 아이들이 자라서 미래의 어른이 된다.
신혼부부가 나누는 오늘의 사랑의 결과가 자라서 미래의 사회가 되고 일꾼이 되고 주역이 됨이다. 오늘 나누는 사랑이 미래가 되어 그 자람대로 우리에게로 되온다는 말이다

지금 당신- 당신은 나, 나는 당신- 은 어떤 사랑을 나누고 있나? 진정 가슴을 열어 후회하지 않을 누구에게 말하여도 떳떳한 사랑을 나누는가? 혹, 당신의 말초신경을 만족시키기 위해 영혼을 구렁에 집어 넣고 흐느낌같은 욕심 채움을 사랑이라고 착각하고 있지는 않는가?

바라보는 것도 죄다. 마음이 사람이다. 영혼이 사람이다. 육신이 사람이 아니고 육신을 지배하는 영혼이 사람이다. 겉이 사람이 아니고 진실한 사람은 그 속에 있는데 요즈음은 속은 없고 겉만이 있는 시대가 되어가고 있다.

『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5:28)』

사람을 만드실 때 어떤 상태가 사람이 되었나? 흙으로 사람을 지었음이다. 하나님이 흙을 재료로 하여 육신을 만드셨지만 육신은 사람이 아니다. 그건 하나의 흙덩이 였을 뿐이다. 결국 하나님이 귀한 혼을 불어 넣으심으로 사람이 된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 지라(창1:27)”

생기가 불어 넣어진 뒤에 사람은 결국 살아 있는 사람의 면모를 갖춘 것이다.
당신은 육신이 먼저라고 생각할 수 있다. 보이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영혼없는 육신은 결코 사람이 될 수 없다. 그저 한덩이 흙일 뿐

나는 아버지의 죽음을 영안실에서 목도 했다. 염하기전 마지막으로 시신을 보여주었다. 초라하고 비참한 모습으로 인생의 결국을 말해 주고 있었다. 평생을 술로 보내시고 호탕하게 살아온 아버지셨으나 결국은 허무한 한덩이 흙의 형태로 산으로 돌아가는 것을...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그렇다 사람의 결국은 그 영혼에 달려 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영혼의 현실을 무시할까. 보이는 것을 쫓아가는 육신적 습성 때문이다. 의심을 좋아하고 보이는 것에 대한 미혹 때문에 선악과를 범했던 하와와 그 남편 아담의 피가 우리에게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 당신은 사랑을 나누시려 하는가? 지금 직장인가? 아니면 출장중인가? 아니면 아무도 모르는 장소에 은밀하게 와 있는가? 아니면 그런 야릇함에 유혹을 받고 있는가? 지금은 아니지만 곧 사랑할 기회가 생겨날 예정일 수도 있다.

진실의 거울을 꺼내라. 누구에게도 진실의 거울은 있다. 아무리 감추려해도 아무리 깨뜨려도 결국에 보존되어 있는 귀중한 거울은 양심이라는 진실의 거울이다. 마음 구석에서 일어나는 욕심을 불어 넣은 허풍선같은 욕구가 진정 이루어도 좋을 사랑인지 점검해 보라

더욱이 당신이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라며 오늘 내가 나누려는 사랑이 앞으로 인류에게 선한 씨를 뿌리는 행위가 아닌, 잠시의 실수나 잠시의 유혹으로 말미암아 썩은 나무를 키우는 행위가 된다면 당신은 결국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끝내 감내해야 한다는 걸 명심하라.

언젠가 당신의 사랑의 결과로 태어날 아기?
그에 대한 깊은 생각이 있으면 좋겠다. 당신이 나누는 사랑의 모습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범죄하지 않는 사랑의 모습이 되었으면 좋겠다.

지금 이 사회를 깨끗하게 하려하는 여러 방법들보다 먼저해야할 치료의 방법이 바로 사랑이 아닐까. 사랑의 행위가 아닐까. 지금부터 나누는 우리의 사랑의 모습. 지금부터 우리가 가지는 나의 사랑의 대상과 나누는 사랑의 형태. 심는대로 거두어 진다는 걸 분명 알자.

그동안 우리의 선진들은 반성해야 되지 않을까. 혼돈으로 사랑을 나눈 결과 지금 이런 몰골로 사회가 변질되고 있다는 사실. 언제 부터인가 이상한 사랑이 아름다움인 것처럼 치부되고 우리 가슴에 자리잡은 사랑의 표준이 비정상적으로 호도되고 있는 곤혹스러움.

이웃집 남자와 몰래 사랑을 나누는 것에 대한 영혼의 상태가 어떨까? 몰래 따먹는 열매가 맛나고, 숨어서 먹는 타락의 과일에 사람들은 이성을 잃고 만다.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이러한 유혹에 대하여 우리는 눈을 감고 자숙하며 바른 성을 찾는 것이 먼저이어야한다.

쌓이고 쌓이면 그 결과는 사회의 통념이 되고 면역이 생기면 그런 것에 대한 거부감이 없어지고 그것을 당연시해버리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러한 모습과 결과들이 지금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 모두의 공감이다.

대체로 어린 아이들은 성에 대해 단순하게 생각할 수 있다. 영혼을 생각하지 않는 상품쯤으로, 물건 정도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적당히 주고 받고 적당한 가격으로 나누고 서로 아무생각 없이 바꿔치기도 하고 아무래도 괜찮다는 의식이 바이러스처럼 급속 확산되고 있음이다.

이제 우리는 이런 아이들을 바라보며 그들을 교육이라든지 순화라든지 종교라는 이름으로 어느정도 치료가 가능할 것이나 그런 것이 근본적인 치료가 아니라 먼저 권하고 실천해야 될 과제는 우리가 지금 사랑을 나눌때의 영혼의 모습을 깊이 관찰해 봐야 한다는 것이다

종교의 지도자란 사람들도 걸려 시험에 들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자신의 아내와만 사랑을 나누어야할 신앙의 사람이 혹 여신도와 정을 나누었다면, 아니 그것이 설혹 넘지 못할 선을 비록 넘지 않았다 하더라도 결과는 이그러진 모습이다.

누구든 자유롭지 못하다. 걸어가는 아름다운 여자를 보면 그를 소유하고 싶은게 사람인데 더욱이 힘(?)이 넘치는 나이의 사람은 욕망이 더욱 진할 수밖에 없으리라. 멋진 대상을 보고 혹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렇지만 지금이 바로 생각할 시기이다.

오늘밤 사랑의 대상자가 누구인가?
요셉은 혼자사는 청년이었다. 외로운 청년이었다. 방황하며 긴 세월을 보낸 청년이다.
욕망이 넘치는 준수한 혈기넘치는 사람이었으며 정욕이 불타는 나이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어떤길을 택하였나?

『 주인이 그 소유를 다 요셉의 손에 위임하고 자기 식료 외에는 간섭하지 아니하였더라 요 셉은 용모가 준수하고 아담하였더라 그 후에 그 주인의 처가 요셉에게 눈짓하다가 동침하기를 청하니 요셉이 거절하며 자기 주인의 처에게 이르되 나의 주인이 가중 제반 소유를 간섭지 아니하고 다 내 손에 위임하였으니 이 집에는 나보다 큰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 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 뿐이니 당신은 자기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 여인이 날마다 요셉에게 청하였으나 요셉이 듣지 아니하여 동침하지 아니할 뿐더러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라 (창39:6-9) 』

우리도 이런 나라의 백성이 되어야 한다. 이 땅을 살리는 길은 먼저 우리의 사랑의 행태를 점검해 보아야 한다. 바른 사랑을 심으면 사랑의 나라가 되고, 사랑이 꽃피는 사회가 되며 사랑만이 사랑을 낳을 수 있다.

당신 - 당신은 나이고 나는 당신이다 - 의 사랑!
오늘 나눌 사랑의 대상은 누구인가? 건강한 내일을 보장받을 수 있는 그런 사랑인가?
사랑! 아이들을 나무라지 말고 당신의 사랑을 회개하고 돌아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