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정엄마는 부잣집 딸로서 신식 교육을 받은 신식 여성 이었다.
이모부 두분은 보성전문과 서울공전을 나온 그 당시 엘리트 셨다.
직장도 총독부와 경북도청 이였기에 처가 대접도 대단했다.
우리 아버지는 갑자기 탕진한 가정의 유교문화 를 중요시하는
집안의 증조부께서 우리 고향에 90년 되는 초등학교 그당시
소학교 초대 교감으로 임용되신 분이고 지방 토호로 살았으나
할아버지 호폐와 보증은 하루 아침에 살림이 탕진돼 아버지의
대구에서 하시던 공부는 중도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실의에
빠졌을때 엄마와 혼인말이 있었고 외가에서는 홀딱 속아서
혼인하게 되었다.엄마의 실망은 물론이고 외할머니께서
혼절까지 하셨지만 옛날에는 사성이 오간후라어쩔수 없이
혼인이 이루어졌다고 하셨다.
외할아버지 께선 아버지의 사람됨을 3년동안 지켜보신 후
혼인은 속은것이 아니다 .양반다운 행동하며 제산세 계산능력
집안에 어려운 일 처리를 하시는것을 보시고 만족 하셨다고
하셨다. 외할아버지께서 아버지의 성적표를 보신후
공부를 시켜려고 맘먹었으나 조부모 부모를 모신 외아들인
아버지는 고향을 떠날 수없었어 대신 외할아버지 께서는
그댓가로 조금의 전답을 사 주셨어 호된 가난을 면했다고
했습니다.그러나 숫기없는 아버지는 웃동서에게 항상
밀리는 모습이여서 처가에 발걸음을 자주 안하신 모양입니다.
그중 부잣집 이모부들이 오시면 한푼씩 주는 돈에 집안에
부리는 사람들 까지도 아버지의 처가 걸음을 더욱 멎게
했나봅니다.엄마도 포기하고 열심히 사니까 시부모님은
물론 온집안에서 는 동네보배라고 어른들이 칭호를 주셨답니다.
엄마의 말씀이 평생동안 어른분의 자애하심이 까다로운
이모집이 부럽잖을 정도로 맘이 행복했답니다.
큰이모는 아기를 못낳아 첩을 얻어 아기를 낳았고
작은 이모는 너무도 힘든 시집살이와 삼남매를 낳기는
했으나 이종언니 혼자를 두고 이모부는 돌아가셨답니다.
외가는 해방후 토지계혁과 외삼촌의 사업실폐로 망하고
인심 좋은 너거 집에 온게 후회 안된다는게 엄마의
철학이였다.아버지가 평생으로 엄마를 위하는 맘은
내가 고등학교 교우지에 배우자 타잎을 아버지라고
할만큼 아버지를 따르고 존경했다.
마지막 가실때까지 엄마의 손을 잡고 "평생을 고생시켰다
하시고 엄마는 당신처럼 좋은 사람만나 행복했다고
할만큼 두분의 사랑은 각별하셨다.
아버지가 가신지 일년도 안되어서 맞은 사위는 아버지를
닮았다는 하객들의 찬사에 엄마는 나의게 돈은 살면서
벌면되고 절대로 신랑 기죽이지 말라는게 엄마의 당부셨다.
그러기에 엄마는 모든게 아까울것이 없이 돈이랑 먹을것을
화물로 보내주셨다.
너 고생을 틀림없이 알아준다는게 아버지와 살면서 얻은
엄마의 삶의 경험이였다.
겨울방학을 지나고 나는 입덫을 시작했다.
빚이 있는것은 엄마는 다 모르고 계셨다.
그저 딸이 기다리던 임신한 것만이 엄마는 기뻐하셨다.
다음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