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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안식처는 어디에?


BY 푸른 하늘 2003-04-12

나의 안식처는 어디에?

그는 나의 일기를 훔쳐 보았다. 가두었던 속마음을 들켜버려 순간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그것도 내 마음이다. 하지만 예기치 않은 충격을 입었을 그에겐 미안하다.

불편한 새벽이 지나고 아침. 그는 내게 시골에 가라고 했다.(오늘은 시댁사촌들이 모이는 계다) 갑자기 감독이 되어서 못 움직인다고, 힘들면 그만두라면서. 난 거절하지 못한다. 아이 셋을 데리고 운전을 하며 가야하는 길인데 힘든 걸 뻔히 알고도 부탁하는 그를 나는 거절하지 못한다. 왜? 글쎄 그건 나도 모른다. 난 늘 그랬다.

집을 정리하고 아이들에게 아침을 먹이고, 막내의 짐을 준비해서 나오는데 벌써 진이 다 빠진다. 아직 난 아침도 못 먹었다. 간밤에 거의 잠을 못자서인지 밥이 목에 넘어갈 것 같지가 않다.

내려가는 길에 계모임에 온 가족들이 나눠먹게 포도나 한 상자 사가야겠다고 마음 먹는다. 여기쯤 있었지 하고 돌아보는 순간 포도 장사를 지나쳐 버렸다. 돌아가려니 유우턴은 보이질 않는다. 잠시 좀 더 꼼꼼히 살피지 못한 나를 탓한다. 가다보면 또 있겠지 하는데 좀체 장사는 보이질 않는다.
적당한 시기에 유우턴을 찾을 수 없는 내 삶에도 언제나 그 원인은 사소한 실수 하나였던가? 이런 때 지나간 일을 후회하며 기억하는 일은 항상 또 다른 부주의를 만든다.

그 순간 농협 공판장이란 반가운 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이미 거래가 활발한 아침시간은 지나서인지 포도도 감도 웬만한 건 다 팔려버렸다. 그리고 배!
남은 건 배밖에 없었다. 다시 돌아갈까 하다가 이나마도 없었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한 상자를 산다. 원하지 않아도 불쑥 내 삶 속으로 들어와 버리는 반갑지 않은 손님 같은 운명이 배 상자에 실린 듯하다.

이런저런 머뭇거림 속에 결국 막내가 잠이 오는지 칭얼대기 시작한다. 처음엔 견딜만한 소리로 끙끙대다가 점점 강도가 높아진다. 할 수 없이 차를 세운다. 그러면 울음은 딱 그친다. 하지만 다시 출발과 동시에 시작하는 울음.
가다서다를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르겠다. 갈 길은 멀었는데 목이 탄다. 어쩔 수 없지하는 생각에 차를 세우고 아이를 업는다. 지나가는 차들의 소리에 아이는 움찔움찔 한다. 도무지 잠들 것 같지가 않다.
하지만 다시 출발하면 또 울음이 시작될 터, 그냥 포기하고 계속 재우기를 시도한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지나가는 차들의 의아함과 동정에 혀를 차는 따가운 시선. 어디선가 본듯한 낯설지 않은 익숙한 시선. 첫 애를 키우는 내내 저녁이며 울어대던 아이를 들쳐업고 동네를 돌며 받았던 바로 그 시선.
세상 속에 내팽겨 쳐져 버린 듯한 허허로움 속에서 괴로움을 동참하지 않고 늦게 오는 그를 얼마나 원망했던가? 이렇게 고스란히 내 몫으로 떠맡기기 위해 아이를 낳았단 말인가 하는 의문 의문 의문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도착하니 네 시간이 흘렀다. 두시간이면 족할 거리를 배의 시간을 들이며 거의 아이울음과의 전쟁을 치르다시피하여 도착한 목적지. 다리가 확 풀렸다.

"간이 커도 너무 큰 여자구나."
시댁 어른들의 즉각적인 반응이었다. 그랬다. 보통사람들이 생각도 않는 일을 자처해서 하는 일이 많은 나는 분명 간이 큰 여자일 거다. 그저 남자의 보살핌 아래에서 화초처럼 나약한 웃음을 지어야하는 것이 내 임무이거늘. 난 오늘 넘보지 말아야 할 경계를 넘어버린 거다.
그렇다. 그것이 항상 나를 어둠 속으로 밀어 넣었다. 남들이 하지 않는 일을 자처함으로 생기는 두 몫의 인생. 살지 않아도 좋을 힘겨운 시간까지 거부할 줄 모르는 그 강인함이...

잠들지 못했던 밤, 먹지 못한 아침, 맞추지 못한 시간들이 일제히 빈 위장을 눌러댔다. 그리곤 아침 먹었어요라는 거짓말을 감추려는 듯 음식을 구경하곤 입가심만 한 체 점잔이 물린다. 어차피 잘 먹지 못하는 회들이 즐비한 내겐 어울리지 않는 식사였다.

벌써 돌아갈 일이 걱정이었다. 지뢰처럼 불쑥불쑥 터지는 막내의 울음 때문에 어떤 귀가길이 될런지는 자명한 일이었으니까
그런 걱정을 알기라도 한 듯 돌아오는 동안 아이는 타자마자 잠들어 세상 모르고 잔다. 이게 웬 떡이냐며 갈 길을 재촉하는데 둘째가 화장실에 가고 싶단다.
아이를 데리고 돌아오는데 뒷통수를 때리는 큰 애의 목소리.
" 엄마, 뭐 살 건지 궁금해서 지범이가 자니까 내가 문 잠그고 나왔어."
"뭐라고? 나오지 말랬잖아. 차에 키 있단 말야."
그리고 끔찍한 시간.
열쇠를 여는 아저씨를 찾는 일이며 기다리는 일이 진행되는 내내 자고 있는 막내가 깨었을 때 느낄 공포 때문에 가슴이 심하게 방망이질을 쳤다.
왜 그리 아저씨는 더디게 오는지, 일요일이라, 고속도로라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만 여간 신경이 곤두서는 일이 아니었다. 결국 아이는 깨서 밖에선 들리지는 않지만 진동이 느껴지는 온갖 몸짓으로 공포를 표현하며 울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잘 놀라는 아이인데...
문이 열렸을 때는 나도 모르게 아이를 껴안고 울어버렸다. 험한 세상 속에 내동댕이쳐진 암담한 기분으로
그리고 다시 영천.
이정표에선 영천과 경부 고속도로의 갈림길을 표시하고 있었다. 한참을 달리고 보니 잘못 접어든 낯선 길이었다. 대구라는 표시만 보고 갔지만 돌아서돌아서 집은 점점 멀어져 갔다.

문득 돌아서 가는 그 먼 길 위에서 활옷을 입은 내 모습이 떠올랐다. 모두들 앞다투어 가기를 원하는 편안한 고속도로를 두고 구비구비 산골길을 택해서 가야만 했던 나의 결혼 생활이...

또다시 눈물이 솟구쳤다. 여기까지 참아온 세월의 파도가 주마등처럼 스치며 지나간다. 걱정으로 이어지는 그의 전화. 이미 그는 미안한 마음만이 가득이다.

나는 집으로 돌아간다.
사람들에겐 편안함의 상징인
나의 다른 일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