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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력범죄와 아동 성범죄자들의 처벌 강화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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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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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게 늙어가는 방법 32


BY 녹차향기 2000-12-19

낮에 식사를 마치고 어머님과 커피를 마시고 있었어요.
추운 날씨 때문이었을까, 아님 어떤 쓸쓸함이 어머님을 스치고 있었을까 어머님은 창밖을 내다보시며
"세월이 너무 빠르다...."
하시는 거예요.
"그래요. 벌써 또 한해가 지잖아요. 어쩜...."
"에구구... 나이먹기 싫어라.."

그 말씀을 하시는 어머님의 뒷모습이 어찌나 쓸쓸하고 또 기운없어 보이는지요.
다시 식탁으로 돌아와 앉으신 어머님께선 결혼초 아주 힘들고 어렵게 살았던 얘기를 처음 꺼내셨어요.

아마 지금 이맘때, 지금 바깥에서 불어오는 바람결 어딘가에서 어머님결혼초기에 느꼈던 그런 느낌이 다시금 살아나셨는지도 모르지요.

"빚보증 때문에 이리저리 쫓겨다니시다 몸에 잔뜩 병만 생긴 시아버님, 그러니깐 아범에겐 할아버지 되시는 분... 얼마나 내게 잘해주셨는지...먹을 것이라곤 변변찮은 살림살이였는데 갑자기 고동이 먹고 싶다고 하시잖아. 그땐 겁도 별로 없었던가 봐. 산길을 몇 구비를 돌아서 바닷가에 혼자 나갔어.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바닷가에 사람들 시체도 잘 떠오른다고 하대. 그 바닷가에 웅크리고 앉아 혼자서 고동을 얼마나 많이 따왔는지... 집에 와서 푹 삶아 할아버지께 드리니 눈이 동그래지며 깜짝 놀라시는거야."

시어머님께서 일을 하고 돌아오시도록 방안에서 혼자 고동을 잡수신 할아버지 모습이 아마 두고두고 잊혀지지 않으신 모양이예요.
"방안에 고동 껍질이 수북히 쌓여있는데,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다음에 또 따다드려야지 하고 생각했었어. 근데 할머니께서 그 사실을 아시고는 나를 얼마나 구박했는데, 시집살이두 그런 시집살이는 없었을거야.
얼마나 딸자식만 위하는지 애쓰고 농사지어 놓으면 몰래몰래 딸네집으로 다 빼돌리는데, 정말 속이 터질지경이었지.
그래두 그저 며느리는 참고 암말 못하고 있어야 되는가보다 하고 바보같은 세월을 살았어..."

결국 할아버님은 병으로 세상을 떠나시고, 빚보증 땜에 차압이 들어온 집을 구하고 싶었던 할머님께서 차압된 쌀을 꺼내 빼돌린 사실이 들통나서 징역살이를 몇개월 하시는 동안 아버님은 술병이 짙어지신지 이미 오래전이고, 어머님 혼자 생활을 꾸려가야 했답니다.

"하루는 혼자 집을 지키고 있는데, 얼마나 무섬증이 드는지 온 몸이 얼어붙을 것만 같았어. 우리집이 마을에서 좀 뚝 떨어져 있는 외진 곳이라 더 했지. 밤새도록 개는 어쩌면 그렇게 짖어대는지.
자는둥 마는둥 아침이 밝아오는데 목이 찢어지도록 아픈거야.
아마 편도선이 무척 부었던가 본데, 뭘 알아야 말이지...
동네에서 의원 비슷하게 주사도 좀 놔주고, 약도 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집에 가서 주사를 한 대 맞고 걸어오다가 길바닥에 쓰러지고 말았어. 먼지가 풀풀 날리는 황톳길을 혼자 걸어오다가 온 세상이 노랗게 변하면서 앞이 보이지 않았지..."

어머님은 이미 그 황톳길에 쓰러져 있는 새댁이 되어있었어요.
서편제에 나오는 그 구비구비 산길과 바닷바람에 뿌옇게 날리는 먼지들이 제 눈 앞에 펼쳐지는 것 같았지요.
나어리고 약한 새댁이 혼자 그 어려운 일들을 헤쳐나가느랴 연약한 마음을 추수리고, 두려움에 떠는 모습이 상상되었어요.
얼마나 힘드셨을까?

문득, 내 앞에 앉아서 말씀 하시는 분이 시어머님이 아니라 내 나이 또래의 어쩜 나보다 나이어린 깨끗한 한복을 입은 새댁으로 보이는거예요. 갸냘픈 몸매를 하고, 세상물정 모르는 순박한 젊은 새댁이 ?M어야 하는 세상살이는 가혹하고 무섭기만 했겠지요...
시어머님은 겉으론 목소리도 크고, 씩씩한 듯 하시지만 마음은 너무 여리고 겁이 많으셔서 어쩔 땐 아이들보다도, 우리들보다도 더 연약하고 여리실 때가 있거든요.

시댁과의 갈등끝에 분가를 하게 되고 드디어 장(10일장, 5일장 하는..)에서 장사를 시작하시게 되었대요. 그렇게 장사를 하다가 아버님께서 술병으로 돌아가셨고, 어머님의 이야기는
"그 웬수같은 술 때문에, 불쌍한 사람,멍청하게 왜 그리 술을 많이 먹었는지...."
에서 끝을 맺었지요.

"괜히 내가 지난 얘기해서 너만 지루하게 했다..."
"아녜요."
"이런 얘기 첨 듣제?"
"예."

다시 먼데 하늘을 쳐다보시는 어머님은 또 쓸쓸한 표정이 되셨다가는 이내
"어디 우리 체리(어머님께서 키우시는 강아지), 바람이나 쐬어주어야 겠다..."
하시며 밖으로 나가셨지요.

갑자기 인생이 허무한 느낌이 들었어요.
그 젊고 갸날프던 새댁은 이젠 간데없고, 흰머리 하얗게 세어 지나간 아픈 과거를 추억하는 칠순을 바라보는 할머니가 되었다고 생각하니 인생이 실로 무상하게 느껴지더라구여.


우리의 삶 자체가 사실은 한바탕 꿈같은 건지도 몰라요.
너무나도 짧은.
어쩜 우리의 짧은 지혜로는 도저히 깨달을 수 없는 어떤 운명과 삶이 우리에게 이미 주어져 있는데, 그걸 알지 못하고 바둥대며 서로가 서로를 질시하고, 원망하고, 어딘가에 숨어있을 행복이란 허상을 찾아 세월을 너머너머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잖아요.

어머님의 젊은 시절 얘기를 듣고나니 어머님이 갑자기 더 측은하게 생각되었어요.
제가 한 때 어머님을 무척 미워했었다고 얘기했었지요?
아마 그때 어머님의 젊은 시절 얘기를 알았었더라면, 그런 갈등의 시간이 더 빨리 줄었을거예요.

어떤 사람과 갈등이 있거나, 그 사람이 너무 미워질 때, 진짜 원수처럼 생각되어지는 어떤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지나온 세월이 어떠했는지, 어떤 상처들이 그에게 있는지 알고난다면 그런 갈등이 조금은 쉽게 해결될 수 있을것 같아요.

어차피 인생은 자신과의 고독하고도 처절한 싸움이라고 믿어요.
두려워 해야할 대상자, 어떤 절대적인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하는 자, 의지를 끝까지 밀고 나갈 자, 다 내 자신이예요.
내 자신과의 싸움에서만 이긴다면 누구와도 어떤 사람과도 힘들거나 두렵지 않게 인생을 살 수 있는거고요.

이제 한해가 며칠 남지 않았군요.
나에겐 어떤 시간들이 얼마만큼 남았을까요?

하루종일 가족들을 위해 열심히 몸과 마음을 애쓰신 모든 님들께
평안한 밤이 되시길 바래요.
감기 조심하시고요,
안녕히 주무세요.....

연말이 다가와서인지
생각이 많아진 녹차향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