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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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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저편


BY 남풍 2003-02-14

술이라는 걸 먹기 시작한 것은 대학 첫 MT때 였다.
워낙 술에 대해서는 좋지 않은 기억이 많아, 소주를 종이컵에 따라
권하는 선배의 잔을 받아 마시곤,
해선 안 될 일을 일을 하는 것 같은 생각에 공연히 어머니가
떠올랐다.

종이컵에 받아 마신 생애의 첫 잔은,
거북스런 냄새와 목안을 쏘는 통증과 씁쓸함으로 몸이 떨렸다.
왜 내 아버지가 찬장 안에 한일소주 됫병을 숨겨놓고 홀짝거렸는지,
이른 아침 동네 구멍가게로 소주 한 잔 마시기 위해 달려 갔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술이란 마시면 는다던가?
꾸준히 마신 노력 끝에 나는 애주가가 되었다.

대학 4년을 38명의 여학생 속에 외로운 두 남학생을 위해 기꺼이
술벗이 되어주고,휴학생과 복학생의 괴로운 심사를 잔 부딪히며
들어주었다.
이십대의 꽃다운 청춘들은 '돌베개'의 맥주와 '백록골'의 막걸리를
'소금창고'의 소주칵테일을 마시며,
분단조국 청년학도의 길을 이야기 하며 날이 새기도 했다.

술보다 술마시는 분위기가 좋다고 늘 말하곤 하지만,
정말 그 분위기가 좋은 건지, 뱃속까지 들어찬 긴장감을 와르르 무너뜨리고 마는 술이 좋은 건지 확실히 알수 없다.
적당히 술이 오르면,
온몸의 세포가 열리며 개구리처럼 피부호흡이 가능한 것인지,
이완되는 몸의 근육들처럼 마음도 유연해지는 것인지,
차오르는 술 기운에 기분이 좋아진다.

시집에 들어와 살기 시작해서 2,3년 간은 차곡차곡 안으로 쌓이는
거북스러움이 턱까지 차올라 숨이 막혀 오면,
형님들에게 구조 요청을했다.
마셔서 풀어라고 주는 잔들 하나도 마다 않고 마셔,
기어이 구토를 하고 나면, 쏟아져 나온 토사물들과 함께
가슴안에 쌓여 있던 내것 같지 않은 감정들도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잠잠해진 위처럼 적어도 한달은 아무렇지 않게 버텨낼 수
있었다.
동네에 칭찬 자자한 모범적인 며느리는 한달에 한번,
마법같은 술의 힘으로 만들어졌다.

지금은 술에 의지하지 않아도
시어머니 잔소리가 크게 마음쓰이지 않고,
영화관 하나 없는 작은 읍도 별로 답답하지 않으며,
번잡스런 도시가 그리울 땐, 1일 6일 서는 오일장을 붕어빵 먹으며
한바퀴 돌면 벌써 집이 그리워진다.

술은 적당히, 즐거운 만큼,
다음 날 깨어 해장국 먹지 않아도 좋을 만큼,
노래방에서 절로 흥이 날 만큼이 적당량이구나하는 생각에
급술을 마시던 습관이 바뀌어 가고 있다.

그런 중에 어제는 왜 그랬을까?
'투다리'라는 고치구이 집에서 동네 아줌마들과 유쾌하게 떠들던
장면 다음에....
아침이 와 버렸다.

'필름이 끊겼다'는 말은 너무나 정확한 표현이다.
당황스러워 아무리 떠올리려해도 단 한 장면도 떠오르지 않는다.
온 동네를 다 돌아 조각조각 맞춰보려 하니,
동네 보물이라며 웃는게 수상쩍었지만,
현란한 춤에
남편과의 잠자리 얘기까지 묻는대로 다 대답했을 줄이야!
그런 얘기 취하지 않아도 다 해 줄수 있다고 뭐가 궁금하냐고
말하면서도 당혹스럽다.

여전히 기억은 나지 않고,
의식이 제어되지 않은 잠재 의식의 세계엔 뭐가 있었을까?
내가 평소에 감추려 했던 것들이 튀어 나왔을까?

내가 나 같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