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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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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흔 다섯 살 할머니가 보내온 선물


BY ooyyssa 2003-02-01

091026
시할머니 앞자리 주민번호다.
거의 한세기를 사신 시할머니는 할머니의 표현대로, 눈이 뿌옇고, 허리가 아픈 것을 빼면 건강하신 편이다.
지금대로라면, 한세기를 거뜬히 사실것 같다.

처음 시집 왔을 때, 할머니는 "에구,내 애기,내 애기."
주름진 눈에 맺힌 눈물을, 스웨터 주머니에서 흰 가제 손수건을 꺼내 훔치며 내 손을 토닥 거리셨다.
주름이 자글자글하고 검버섯이 피어 있는, 할머니 손은 그래도 따뜻했다.

"무거운 거 들다 허리 상하면 큰일난다. 나도 한 삼년 전에 자리젓 항아리를 들다가 삐끗한게...."로 시작하면 끝없이 옛이야기를 풀어 놓고, 담배사러 왔던 사람이 할머니에게 인사를 하면, 눈이 어두워서 몰라봤다로 시작하여 주변 사람들 안부를 묻고 답하느라 손님을 쉬 보내지 않았다.
아마 하루종일 이야기하라면, 허리만 아프지 않다면 종일토록 이야기할 것이다.
한 세기 가까운 세월을 살았으니, 할 얘기가 얼마나 많을까?

주먹을 쥐고 숙여진 허리를 두들기며, 베개하나를 벽에 붙여 놓고,
기대 앉아
"이제 내가 여든만 났어도, 애기 하나는 거뜬히 키울텐데..."하며
딸 둘에 아들 하나 있는 손주며느리인 나에게 아들하나 더 낳으라고, 은근히 부추기며, 한편으론 늙음을 한탄했다.

아들을 저승에 먼저 보내고, 홀로 된 며느리와 십여년을 살고, 손주며느리와 같이 칠팔년을 더 살고, 삼년 전 할머니는 죽기 전에 딸집에 가서 살고 싶다했다.
할머니는 이십년 이상은 묵었을 천으로 만든 가방에 갈아 입을 옷 몇가지와 우산대로 만든 지팡이를 짚고, 안경 사이로 눈물을 닦으며,
고모 집으로 가셨다.

할머니는 간간이 전화를 해서 대충 안부를 묻고 나서,
"에~구~ 내 애기~"하고 부르는 것은 이제 내가 아니라, 할머니의
아들에 아들에 아들인 내 아들이다.
"왕 할머니, 빨리와." 하고 끊는 아이에게 물어보면,왕할머니가 밥 많이 먹고 많이 크라고 말했다고한다.

설인데, 할머니가 못오시겠다해서, 사탕 몇봉지와 국 끓여드시라고 남편이 낚은 돔 몇마리를 들고 아이들이랑 남편이 대표로 할머니를 뵈러 갔다.
다 저물어서야 들어 온 아이 손에는 남자 양말 두켤레와 '케토톱'
파스 세봉지가 들려 있다.

아흔다섯살 시어머니가 쉰아홉난 며느리에게 보내 온 파스 세봉지.
아마도 무료로 진료받는 노인환자인 할머니가 병원에서 받아와서,
며느리를 위해 남겨둔 모양이다.
하긴 그 며느리도 이제 파스가 많이 필요해진 나이가 되었다.
양말 두켤레 중 하나는 큰 손주인 내 남편 거고, 한켤레는 설 때마다 와서 할머니 용돈 주고 가는 쉰 넘은 총각 삼촌에게 '공을 갚으지 못해서' 보낸 거란다.

평소 좋고싫음 잘 표현하지 않는 시어머니도, 고모 꽤 졸랐겠다며
파스와 양말을 만지작 거린다.

우리를 그렇게 아끼셨건만, 눈 앞에 없으니 잊고 살았는데,
할머니 날마다 머리 속에 '내 애기들'을 그리며 사셨구나 생각하니
마음 한 구석에서 바람이 분다.

할머니 "에~고 내 애기." 소리가 너무 듣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