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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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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 시집 한권이면 행복해


BY 수국 2003-01-12

: 난 시집 한권이면 행복해 :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하얀종이에 검정팬이 남긴 글자 자국이 너무 좋아 아무 글씨나 써봅니다.
나는 시인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나는 나 하나도 울게 웃게 못 하는 시인보다는 그냥 일기나
꼬박꼬박 쓰는 아줌마가 되고 싶을 뿐입니다.

시인들은 하얀백지를 보면 무섭다고 하는데 난 하나도 무섭지 않습니다.
하얀공책에 쓸 말이 없을 때는 꽃도 그리고 나무도 그리고 새도 그리고 그렇게 하다 보면
꽃이 나에게 말을 시키고 나뭇가지에 멧새 한 마리쯤은 날아와 앉아 하얀 공책은 금새
말들의 잔칫상이 차려집니다.

나는 지금 행복합니다. 아무것도 되지 않으려고 마음 먹으니 마음은 하늘 위를 나는 새들처럼
가볍습니다. 나 하나쯤 시인이 안된다 해도 세상에 시인은 거지보다 많다는군요.
그런데 거지보다 많은 시인이 산다는 이 세상은 왜 이렇게 불행한 일들이 많을까요?
내 생각엔 시인이고 거지고 간에 배가 고프긴 마찬가지기 때문일겁니다.

그러고 보면 난 참 행복한 사람입니다.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적지만 요기 저기 쪼개서
자식도 키워내고 봄이면 이쁜 꽃도 키워내는 작은 뜨락도 있으니 이만 하면 시인도 부럽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내 공책 갈피에는 오천원짜리 도서상품권이 하나 있습니다.

초등학교 오학년 막내 딸년이 크리스마스날 책 좋아하는 엄마를 위해 떡뽁이 사먹을 돈을
모아 내개 선물로 준 것 입니다. 올 크리스마스엔 난 아무것도 딸아이에게 선물을 못 했습니다
딸아이는 싼타할아버지가 없다는 걸 이년전에 벌써 알아 버렸거든요.


난 어떤 선물보다 이 오천원짜리 도서상품권이 제일 좋습니다. 며칠동안 공책 갈피에 잘 간수해
놓고 공책을 펼쳐 일기를 쓸 때마다 한번씩 꺼내보곤 이걸론 어떤 책을 살까 행복한 고민을
아주 길게 즐기다가 날씨가 풀려 찬거리라도 사려가는날 시장가는길 사거리, 송약국 맞은편
한번도 못들어 가봤지만 빨간 피자헛 가게 그 옆 의정부에선 제일 큰 책방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내 가슴은 책을 보는 즐거움으로 콩당거립니다.

사서 읽고 싶은 책은 많지만 오천원짜리 상품권으로 더도 덜도 보탤 돈 없이 살 만한 책은
시집 밖에 없습니다. 그래도 내가 좋아하는 책이 시집이니 얼른 시집이 즐비하게 꽂혀있는 책꽂이
로가 쪼그리고 앉아 좋아하는 시인들의 시집들을 꺼내서 하나 하나 읽어 봅니다.

아세요 이 기분
새책에서 풍기는 잉크냄새 갓 구워낸 빵처럼 구수하고 맛있는 이 냄새 누가 뭐랄 사람이 없고
찬거리 살 일이 없다면 하루종일 쪼그리고 앉아 진짜 시인들의 아름다운 시상에 젖고 싶습니다.

더러 쪼그리고 앉은 다리에 쥐가나 이리저리 엉덩이를 뒤척거리며 읽다 찾아낸 "이책이다 싶은
시집 한권" 저린 다리를 쭉 펴고 일어나 시장가방에 넣어 둔 도서상품권을 내면 책은 내것이
됩니다. 참 그렇다고 여기서 끝나는 건 아니죠 내가 책을 살 때마다 책값을 지불하고 책방아저씨께
꼭 하는 말이 있거든요 " 아저씨, 때 지난 잡지 있으면 좀 주세요?" 하면 아저씨는 서너달은
훌쩍 넘긴 좋은생각이라든지 샘터, 해피데이스 같은 책부피는 얇지만 내용은 튼실한 책들을
써비스로 준답니다.

이렇게 해서 새로 산 시집은 이정록시인의" 버드나무 껍질에 세들고 싶다"란 제목의 시집입니다.
앞으로 이 시집은 두고 두고 내손에서 떠날 날이 없을겁니다. 밥을 짓다 뜸을 들일 시간에도
늦은밤 남편과 아이들은 골아 떨어지고 내 눈을 겨울밤 하늘처럼 쨍해 도대체 잠이 안오는
밤이면 난 이 시집을 읽고 읽고 또 읽을 겁니다.

참 제가 시장을 갔다 왔나요? 그렇군요 제 시장가방에는 대파의 푸른잎이 쑥 불겨져 나와 있군요
어서 집으로 가서 저녁 찬을 마련해야겠지요. 내 식구들은 詩로 반찬을 해 줄 수가 없으니까요
시간만 나면 책을 끼고 사는 여편네를 우리 착한 남편은 "그 놈의 책 고만 읽어라" 하는 말을
한번도 한 적이 없으니 나는 또 한번 행복한 여편네입니다.
하기사 나도 내 남편이 좋아하는 스포츠 중계 보는걸 한번도 탓한 적이 없으니 비겼네요.

저녁밥을 짓는 옆에서 알짱거리는 딸애에게 "엄만 요렇게 키도 작고 평범하게 생긴게 참 좋아"
만약에 내가 키도 크고 멋지게 생겨 사람들 눈에 잘 띈다면 오늘처럼 책방에 쪼그리고 한참을
앉았다 올 수 있겠니? 그 책방 책꽂이 사이는 참 좁아서 큰여자가 앉아서 책읽기는 어렵던데...
딸애는 이렇게 말하는 제 엄마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냥 실실 거리며 웃습니다.

참! 이정록 시인의 시 한편 적어 드릴께요 함 읽어보세요

제목:숟가락

작은 나무들은 겨울에 큰단다 큰 나무들이 잠시 숨돌리는 사이
발가락으로 상수리도 굴리며 작은 나무들은 한겨울에 자란단다
네 손등이 트는 것도 살집이 넉넉해지고 마음의 곳간이 넓어지고 있는 것이란다

큰애야, 숟가락도 겨울에 큰단다 이제 동생 숟가락들을 바꿔야겠구나
어른들이 겨울 들녘처럼 숨고르는사이, 어린 숟가락들은 생고구마나 무를 긁어 먹으며
겨울밤 고드름처럼 자란단다

장에 다녀오신 어머니가 福자가 씌어진 숟가락 세개를 방바닥에 내놓으신다
저 숟가락이 겨우내 크면 세 자루의 삽이 될 것이다

쌀밥을 퍼올리는 숟가락처럼 나무들 위에 눈이 소복하다
한뻠 두뼘 커오를 때마다 나뭇가지에서 흰눈이 쏟아지고
홍역인 듯 항아리 손님인 듯 작은 새들이 날아간다

하늘이 다시 한번 털갈이를 시작한다
............................

그러고 보니 나도 딸년들 숟가락을 바꿔줘야 할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