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작가

이슈토론
아내가 사전 동의 없이 식기세척기를 구입하여 분노한 남편 사건을 보며 이 부부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말씀해 주세요
배너_03
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조회 : 325

부여 단상


BY norway 2001-07-22

언제나 이 방을 잘 가꿔주고 계시는 낯익은 분들, 반갑습니다.

좋은 글로 연재를 해주시는
hoesu54님, 녹차향기, 닭호스... 존경스럽습니다.
녹차향기는 벌써 100회를 눈앞에 두고 있구나...

글만 쏘옥 읽고 가는 제가 미안스러워서...
간만에 저도 글 한자락 올립니다.
뭐....
저를 기다려주신 분이 없었을지라도....
괜찮습니다.
이렇게 뜬금없이 들러서 글 남길 수 있는 이곳이 참 좋으니까요.


[부여 단상]

금요일에서 토요일 사이를 부여에서 지냈습니다.

부여에는 한 여자가 살고 있습니다.
키가 작고
맘이 착하고
술 잘 마시고
늘 힘든 길만 가는 여자.

그녀를 알게 된 지 15년.
그녀와는 같은 직장에 다녔고
연대 앞 프리버드라는 자그마한 술집에서
주인 아저씨가 귀가 멍멍해질 정도로 틀어대는
음악을 들으며 술을 마셨고
소리를 질러가며 이야기를 했고
서로의 눈물과 웃음을 바라보았지요.
그리고 그녀는 저한테
<언니가 남자였음 좋았을 텐데...>
최상의 고백을 하였답니다.

시를 쓰다가
그림을 그리다가
번역일을 하다가
그녀는 사진작가가 되었습니다.

한 남자를 사랑하였고
다른 남자와 동거를 하였고
또다른 남자와 결혼을 하였지만
그러나 그녀는 지금 이혼을 하고 부여에서 혼자 삽니다.

올봄, 고달프기만 한 서울살이를 정리하고
부여라는 낯선 도시로 떠났습니다.
100여 평이 되는 허름한 집을 3천만 원에 전세 얻어
너른 마당에 맨드라미, 해바라기, 가지, 고추, 상추, 호박, 옥수수... 등을 심고 가꾸며
언제나 그녀의 삶을 위로해 주었던 음악을 들으며
그녀는 혼자 삽니다.

그녀의 집 대청마루에 기대어 앉아,
하룻밤 하루 아침을 푹 쉬다 왔습니다.
내리치는 천둥과 번개를 구경하고,
대청마루 앞에 얼기설기 올린 넓은 박 잎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그녀가 차려주는 술상을 받았고
맛있는 밥을 먹었습니다.
<언니, 우리 집에는 호박밖에 없어요...>
그녀의 말대로
호박나물, 호박잎찜, 호박찌게...
반찬은 온통 호박뿐이었습니다.
<올 여름은 호박으로 살아가네요.
다른 푸성귀도 잘 자라고..
먹고 사는 데 아무 걱정이 없어요.
가을이 오기 전에 호박 썰어 말려놓아야 돼요.
그래야 겨울에 굶어죽지 않지...>

어떻게 먹고 사냐는 물음에
반찬은 앞마당의 호박과 푸성귀로 해결하고
가끔씩 자신을 걱정하는 사람이 사주는
사진을 팔아 번 돈으로 살아간다고
저보고 걱정하지 말라고 하더군요.

그녀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으며
우리는 우리의 청춘을 되짚어 보았습니다.
<참 많이도 흘러 왔구나, 우리는....>
같이 한 시절을 보냈던 그 사람들...
사랑의 몸살을 앓던 누구는 지금 번역가가 되어 파리에 있고,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떠들썩하게 결혼하여 행복하게 살던 누구는 새로운 여자가 생겨 이혼을 하고,
너무나 순수해서 철이 없어 보이던 누구는 병으로 죽고,
그 순수를 사랑해서 그와 결혼했던 누구는 청상과부가 되어 앞으로의 삶을 걱정하고,
다른 이들보다 앞서가기를 좋아했던 누구는 하버드에서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공부를 계속하고 있고,
가장 경쾌하고 매력적이었던 누구는 잘 나가는 작가가 되어 있고,
언제나 똑부러진 말솜씨를 가졌던 누구는 변호사 남편을 따라 영국으로 갔다가 소식이 끊어졌고......

참으로 우리는 그 시절에서 많이도 흘러왔더군요.

<난 언니가 떵떵거리며 살 줄 알았는데....
천하에 무서울 게 없을 것 같던 언니였는데...
언니, 참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잖아...>
그녀의 말에
그래, 앞으로는 떵떵거리며 살아야지... 하고 대답하며,
근데 어떻게 사는 게 떵떵거리며 사는 거니? 하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녀는 한참을 생각하더니
<언니 마음 내키는 대로 살아요.
그게 언니한테 어울려요....> 하더군요.

그녀의 집에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어떻게 살면 떵떵거리며 살 수 있을까?
많이 많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다 얻은 결론은....
지난 두 해 동안 내내 생각하고 또 생각해 왔던 결론과
답이 똑같았습니다.

나를 사랑하자!

그래요, 앞으로는 나를 사랑할 것입니다!
내 딸을 지극히 사랑하듯,
그렇게 열심히 나 자신을 사랑할 것입니다.

그게 바로 내가 떵떵거리며 사는 모습일 것입니다.
나는 앞으로 떵떵거리며 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