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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조회 : 252

편지요... 두번째


BY 영광댁 2001-07-15


삶의 고비마다...

29시간 단수라고 여기저기 안내 문구가 돌아다니고 동사무소 직원이
마이크에 대고 알리고 다니더니 드디어 단수였어요.
아껴쓰면 사흘을 쓸 물을 받아 두고도
어디 먼데서 오는 바람소리로 오는 열린 수도 꼭지는
너무 멀어서 감지하기 어렵고 순간 암담해집니다.
일상으로 통하는 길 하나만 막혀도 벽을 느끼는 마음이라니요.

그날은 아이들의 개교기념일이고
아이들 아빠는 월차를 신청했고
저는 날마다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점을 이용했습니다.
친구에게 낙엽과 바다를 볼 수 있는 곳이 없을까 참 오랜만에
전화 했더니.
들깨꽃 향내라며 저를 좋아하는 그 친구는 기차표까지 예매해 두고
연락이 왔습니다.
그래요.그날은 결혼 10년만의 외출이였고
가족끼리 낯선 곳으로 기차여행을 가는 날이였어요.
김밥을 싸들고,가방을 들러매고....
눈을 뜨는 햇빛 밝은 날들이 다 자기 생일이라는 철학을 가진
아이들 아빠인 남자와 함께 가는 여행길이였어요.
하마 세월 저 뒤로 유보시켜둔 신혼여행이였는지도 몰라요.

단수인 날에 물을 아껴가며
김밥 준비를 마쳐두고 아껴가면서.
이쁘고 귀한 것들 아껴가며 보듯이 생활의 모든 것
단수라고 생각하고 눈을 돌려 보니 모두다 정다워서 눈물났습니다.

단수여서 어려웠던 날들을 아껴가며 설움 참고 살았다가
그날은 아이들 앞세우고 출근하는 사람들을 헤집고 마을버스와 전철을 갈아타고 아침 7시 50분에 출발하는
친구가 예매하여둔 왕복 기차표를 끓어서 장항선 기차를 잡아 탔습니다.

서울 근교 어느 작은 도시의 역장인 내 오래된 친구인 그 남자하고는
참 많은 편지들을 주고 받았습니다.
어느 잡지에 낸 글이 상을 받게 되었는데 그 글을 보고 달려온 그때의 그 친구는 강원도 심신산골에서 국방의무를 하고 있던 군인이였지요.
어느 시절엔 묵묵부답으로, 침묵으로 세월이 흘러 기억에만 남아
가슴속 방에 참 고운 이미지의 액자로 걸려 있더니
어느 날 한통의 전화가 걸려와 전하는 말.
"기억하시겠어요.제가 서울역에 있습니다.어디 가실 때 표 구하기
너무 힘들고 어려울 때 오세요.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전화번호는 옛날의 수첩을 뒤져 시골 어머니께 전화해서 알았습니다.
제가 드린 이 전화가 폐가 되지 않겠지요".라고요.
그리고 어머니의 땅에 가려고 기차표를 끓기 위해 역에 나가서 이렇게
말을 나누었습니다.
"서로 얼굴을 모르잖아요. 제가 표 끊는데서 서성이겠습니다.
제복을 입었고 명찰을 달았습니다...."
우리는 둘 다 이렇게 말을 나눈 것 같습니다.
"편지를 받고 생각해보던 영상 그대로네요".라고.
또한번 그 친구를 만난 것이 명절이 되어 어머니의 땅에 가려고
기차표를 부탁했을 때 친구는 서울 근교의 역장으로 자리를 옮겨 앉았더군요.
한 사람을 알기 시작해서 근 20년만에 두 번 본 얼굴이
삶의 고비 한 자락에 친구라는 이름으로 고여 있습니다.

가슴으로 부르는 노래로 이따금 제글에 조금씩 모습 내비치는
이제는 늙고 병들고 메마른 기침으로 남아 있는 어머니가 제가 삶에 목이 메여 말을 잃고 살 때 가만 전화하셔서
"경자야, 당귀 술 잘 익었다, 놀러 오너라.하셨습니다.
그러다가 술이 과해지면 "무슨 술을 그리 먹냐"고 혼을 내시면
"배.고.파.서..."라고 했지요.
"배고프면 밥 먹어야지".혼내시더니.
당신도 그러셨어요,
"죽은 죽어도 먹기 싫고(없던 시절에 너무 많이 먹어서)"
"밥은 바빠서 못 먹겠고(일이 많아서)"
"술은 술술 넘어 가니까 먹는다"고요.
삶의 고비 한 자락에 어머니가 계셨습니다.
제 쌀독을 걱정하시던..

만날때마다 고맙다고만 하시는 시어머니가 계십니다.

문안 안부처럼 날마다 전화해서 잘 사느냐 묻는 내 삶에 큰 나무의 그늘을 드리운,
혹여 마음 다칠까봐 늘 주면서도 눈치를 보는 언니가 있습니다.

옛날이였으면 병을 고치지 못하고 굶어서 죽었을지도 모르는, 생후 한달만에 수술을 끝내고
이젠 잘 자라 우리들은 1학년을 배우는 아들이 있습니다.

수영장에서 죽은 얼굴로 나왔다가,다시 살아난 갈래머리 3학년 딸이 있습니다.

상처를 받았던 일들을 사람들이 내리는 역에 슬그머니 밀어서 떨구었습니다.


남편과 나로 인해 생긴 삶의 고비들을 대천 바닷가에 풀어놓고 술잔을 기울였고,아이들은 밥도 잊고 모래사장에 앉아 놀고 있었습니다.

. . .
. . .
살아온 기적이
살아갈 기적이 된다고
사노라면 기쁨이 있다고 (김 종삼)
노래한 시인이 말을 생각해봅니다.
거기 가슴 드러낸 바닷가에 큰 글씨로 이 메일 주소를 써 놓고 왔습니다.
ksh2683@hananet.net.

삶의 고비나 막다른 길에서 다정한 눈길을 준 어머니처럼
혹은
내게 삶의 희망과 용기를 준 사람들처럼 가만히 소식이 올겝니다.
왔.다.가.렴. 기.다.릴.께........라고요.
그게 다시 10년이 안되길 바라면서
나는 돌아왔습니다.
20010715


비가 오니 그렇게 지나간 시간이 떠오르네요.

즐거운 일요일 잘 지내세요.

갑자기 에세이방 여러 친구들 이름을 큰소리로 불러보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