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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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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


BY baramandgurm 2002-12-17

풍 경


도토리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고 다람쥐가 분주히 달려갑니다. 쪽 빛 하늘과 홍조를 띠기 시작한 숲이 깊은 포옹을 하고 있습니다. 나무 줄기가 수액을 빨아올리기를 줄이자 잎은 곧 때를 알고 자신의 존재를 마지막으로 아름답게 치장하는가 봅니다. 이별의 시간을 위한 마지막 단장일까요?

제가 이 세상에 와서 지나치곤 했을 가을이 짚어보니 벌써 마흔 세 번쨉니다. 알밤이 떨어지는 밤나무 숲을 가시에 찔리면서 뛰어다니던 유년 시절부터 가을걷이에 여념이 없으시던 노 부모님을 안타깝게 지켜보며, 농사를 지어 볼까 꿈꾸던 일, 뜻하지 않게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하면서 단풍 든 산을 찾아 휴일마다 떠나던 이십대, 아이를 등에 업고 단풍잎을 주워 책갈피에 끼우던 신혼, 그리고 지난 몇 년은 휴일조차 없이 생업에 최선을 다해야 했습니다. 이렇게 한가롭게 산사로 오르는 길을 걷게 된 것이 얼마 만인가 아득합니다. 하늘도, 맑디맑은 하얀 구름도, 산새들도, 저 햇살 속의 단풍도, 옛 이야기처럼 아름답습니다만, 이곳에 제가 없습니다. 덧없는 생각을 예까지 끌고 와서 방황하고 있는 자신이 누추합니다.

경내에 들어서니 아미타 부처님을 모신 미타 전에 기와 불사가 한 창입니다. 너무 오래되어 잡초가 무성하고 비가 샌다는, 낡은 기와를 걷어내는 것입니다. 예닐곱 명의 인부들이 기와를 뜯어 한 곳으로 나르고 알미늄 관을 나란히 두 줄로 세워 기와를 한 장씩 내려보내면 밑에서 받아 수레에 실어 나릅니다. 그들의 몸짓이 어찌나 진중하고 유연한지 일을 한다기보다 경건한 의식을 거행하는 성직자들 같습니다. 전국의 사찰을 두루 다니면서 불사만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이랍니다. 바로 그 아래 법당에는 많은 신도들이 모여 재를 올리고 있습니다. 향내가 바람결에 스치고 독경 소리가 낭랑합니다. 마침 음력 9월 9일 중양절이라고 합니다. 삼월 삼짓날 왔던 제비가 강남으로 간다는 날이고 양수가 겹쳐 좋은 날이랍니다. 맑은 가을 햇살에 지옥문도 활짝 열리는 모양이지요? 합동 천도 재를 올리는 중이랍니다. 잠시 그들이 부러웠습니다. 절기를 놓치지 않고 산사를 찾아 조상께 예를 다하는 마음과 시간의 여유가,

저는 참배도 않고, 하릴없이 빨간 단풍이 떠다니는 연못가에 앉아 지붕 위에서 기왓장을 내리는 인부들의 모습과, 아래 법당에서 재를 올리는 신도들의 모습을 번갈아 지켜봅니다. 인부들 중에는 여인이 한사람 끼어 있습니다. 짙은 검은 색의 긴 머리 결이 햇빛에 반사되어 고와 보입니다. 낮 빛이 희고 이목구비가 큼직큼직하며 큰 키에 비해 호리호리한 몸매입니다. 그런 모습으로 저 무거운 기왓장을 다섯 장씩 익숙하게 들어 나르는군요. 남정네들도 간간이 허리를 펴고 하늘을 우러르고, 나르는 기왓장이 석 장이었다 넉 장이었 다, 불규칙한데 그녀의 몸짓은 한결 같습니다. 여인에게 자꾸 시선이 가는 것은 제 마음의 저항인지 모릅니다. 한가할 틈 없이 달려 온 숨 가쁜 시간, 모처럼의 한유도 즐기지 못하는 여유 없는 마음, 그리고 아무데서나 그저 쉬고만 싶은 가당찮은 게으름, 그런 것들이 뒤엉켜 스산해 지고 마는 제 마음을 저 노동에 열심인 여인의 모습에 붙들어 매 듯 저는 그녀를 유심히 바라봅니다.

새참 시간인지 인부들이 사다리를 타고 내려옵니다. 독경 소리도 멎었습니다. 그런데 지붕 위의 여인은 오히려 휘적휘적 용마루로 올라가더니 등을 보이며 오두마니 앉습니다. 푸른 하늘가에 흙더미만 남아서 뭉툭해진 용마루가 작은 언덕처럼 보입니다. 여인의 하얀 셔츠자락이 가볍게 바람에 날립니다. 법당을 나서는 신도들의 부산한 발걸음과 사뭇 대조를 이루는 참으로 한가한 모습입니다. 그녀의 발 밑에서 행해지고 있는 일들, 독경소리와 향내, 혹은 법당을 나서는 여인들의 신발 끄는 소리라던가, 상을 차리는 공양주의 분주한 손길 그런 것들을 그녀도 알고 있을까요?. 세사에는 관심이 없는 듯, 홀로 하늘가에 앉았습니다. 그녀가 고독해 보입니다. 술이라도 한 잔, 담배라도 한 대 권하고 싶은 충동이 입니다. 그런데 웬 일일까요? 갑자기 푸른 하늘이 하얀 소매 자락을 드러내어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안는 것처럼 보입니다. 제 눈을 의심했습니다. 눈을 비비고 질끈 감았다가 떴습니다. 분명히 물안개처럼 혹은 낮은 구름처럼 하얀 무엇이 그녀의 어깨를 살며시 감싸며 넘실대고 있습니다.

그저 마음으로 권한 담배 한 대를 그녀가 피우고 있다는 것을 알기까지는 조금 시간이 걸렸습니다. 가을 숲도 달관한 노승의 눈빛처럼 초연히 그녀를 바라봅니다. 그녀도 이 가을 햇살에 익어 가는 것일까요? 그곳에 오래 전부터 있었던 듯 그녀의 존재가 둘레의 풍경과 하나를 이룹니다. 하기야 이 맑은 바람과 볕에 익어 가는 것이 어디 도토리와 알곡 뿐 이겠습니까. 참으로 아름다운 계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