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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나비


BY baramandgurm 2002-12-07

겨울나비



내가 가게를 연 지 얼마 되지 않은 오래 전 일이다. 그 날 아침도 다섯 살짜리 아들녀석을 떼어놓는데 한시름을 하고서 전철을 탔다. 자리를 잡고 앉아 잠깐 졸다가 까르륵거리는 아이의 웃음소리에 눈을 떠보니 서너 살이나 되어 보이는 꼬마가 차 바닥에 엎드려 뒹굴고 아이의 어머니는 일으켜 세우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 개구쟁이의 귀여운 모습에 울먹이던 아들 녀석이 크로즈 업 되면서 눈물이 왈칵 솟았다. 목적지가 멀었지만 하는 수 없이 차에서 내려 흐르는 눈물을 추스리고 한참만에 다음 차를 탔다.

애써 무심한 척 빈 통로에 눈길을 두고 앉았는데 저 쪽 칸 문이 열리더니 커다란 판넬을 가슴에 달고 비렁 바구니를 든 젊은 남자가 더듬거리며 건너왔다. 먼 빛으로 봐도 구걸하는 사람치고는 얼굴이 훤하다. 체격이 좋고 피부도 희고 말갛다. 가까워지자 판넬의 내용이 보였다. 천재 음악 소년 아무개, 일찍이 약관의 나이에 악기를 발명했고, 천재적인 피아노 연주가로 텔레비전에 소개 된 바 있으며 잡지에도 여러 번 실렸다는 내용이었다. 왜 그런 사람이 구걸을 할까 의아해하며 나는 아직도 칭얼대고 있을 아들녀석이 마음에 걸리던 터라 기도하는 마음으로 깨끗한 지폐 한 장을 내어 주었다.

그러자 그가 문득 걸음을 멈추고 말을 걸어오는 것이었다. 부끄러워 얼굴을 붉히면서도 열심히 손짓 발짓을 해 가며 나를 이해시키려 애썼다. 만약에 내가 어떤 음악을 생각하며 발장단을 치면 그는 그 음악을 알아 맞출 수 있다는 것이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귀도 좀 어두운지 어떤 말에는 쉽게 반응하고 어떤 말은 못 알아들었다. 아직도 나는 그가 말하고자 한 뜻을 내가 정확히 이해했는지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다. 어쨌든 잠시 후에 그는 내 발등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갑자기 차안의 분위기가 웅성거리며 구경꾼들이 모여들었다. 당황한 나는 그의 귀에다 대고 작은 소리로 곤란하다고 말했다. 순간 앞도 못 보는 그가 후다닥 일어서더니 바람처럼 내달려 사라져 버렸다. 나는 어안이 벙벙하였다. 전철에서 내리면서 혹시 꿈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는 왜 그런 모습으로 구걸에 나섰는지 내게 바랬던 것은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봤다. 천재라고 한 차례 세상이 떠들썩했던 모양인데 도대체 천재가 무엇인가? 눈과 귀가 어두운 그는 소리를 찾아 거리에 나섰나보다. 사람의 혼 속에 흐르는 소리와 운율을 흥이 오른 맥박에서 찾아내겠다는 것 아닌가. 소리 이전의 소리, 말 이전의 말, 우리네 범인에게는 가당찮은 욕심이거나 허황한 환상으로만 느껴지지만, 그의 태도 속에는 그저 간과할 수만은 없는 어떤 진지함이 있었다. 인식의 한계를 넘어서 소리를 통한 또 다른 깨달음의 문을 두드리고 있음에 틀림없다. 어쩌면 그는 나비가 되려고 스스로 고치 속에 자신을 가두는 번데기처럼 소리의 문(귀)과 색의 문(눈)을 닫아 걸어버린 것은 아닐까하는 비약적인 생각까지 들었다. 그 후 다시 만날 수 없었지만 그에게 미안한 마음이 간간이 들면서 소식이 궁금했다.

그런데 지난 어느 겨울 아침이다. 전철에서 내리는데 봄 셔츠만 입은 머리가 긴 남자가 더듬더듬 계단을 내려서는 게 보였다. 남자는 더듬거리면서도 손가락을 튕기며, 다리 장단을 치고 춤추듯 천천히 걸었다. 살을 에이는 듯한 혹한의 날씨에 얇은 셔츠만 입은 것과 흥겨워 하는 모습에 호기심이 일어 슬쩍 다가가 얼굴을 훔쳐보았다. 그 사람이었다. 몇 년 전 전철에서 잠깐 만나 소리의 새로운 차원을 열어 보인 그 천재(?) 음악가였다. 빨갛게 상기된 얼굴에는 웃음이 넘치고 연신 손가락을 튕기며 온몸으로 노래하며 춤을 추고 있었다. 한바퀴 핑그르르 돌기도 하고 좀 큰 소리로 웃기도 하면서 그는 기쁨에 차 있었다.

드디어 나비가 되었나! 기쁨의 노래를 찾았나, 나는 반가운 마음에 다가갔으나,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덩달아 어깨를 으쓱거리며 슬금슬금 그의 뒤를 몇 발짝 따랐다. 그가 부르는 노래를 가슴으로 들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귀머거리 베토벤이 어두운 터널 속에서 저 위대한 환희를 창조하였을 때의 감동이 저랬을까. 힐끔힐끔 쳐다보다가 '미쳤네'하고 돌아서는 사람들이 야속하다. 나는 그가 계단 저쪽으로 사라지자 아쉬운 마음으로 돌아섰다.
다시 만날 수 없을지 모른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도 싶었다. 그러나 준비 된 얘기가 없었고 이미 그와의 대화란 언어, 이전의 문제가 아닌가.

지하도를 나서니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춤추는 나비처럼 세상의 지붕을 덮는 첫눈의 축제였다. 건너편 출구로 드러나는 그의 뒷모습에 내 눈시울이 젖었다. 그도 너울너울 춤을 추고 있었다. 세상은 꽁꽁 얼어붙고 사람들은 저마다 문을 닫아거는데 이제 날개 짓을 시작한 저 한 마리 겨울 나비는 어디로 날아가는 것일까? 하얀 눈꽃 위에 날개를 접고 하늘의 노래를 부르려는가.